『반야심경』 (1)
불교의 근본 내용을
전부 담고 있는 『반야심경』
혜담 스님
불광법회 선덕
들어가는 말
『반야심경』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불교권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전이다. 『반야심경』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260자라는 짧은 경전이면서도 불교의 근본 내용을 전부 담고 있다는 특징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경전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온갖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이 속해 있는 일련의 경전들을 통칭 『반야경』이라고 부르는데, 이 『반야경』이야말로 대승 경전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전이다.
대승불교는 소승 교단이 부처님의 근본정신인 “일체중생의 구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소승 교단이 안고 있는 여러 모순을 지적하면서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의 선구 경전이 『반야경』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경전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온갖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이 속해 있는 일련의 경전들을 통칭 『반야경』이라고 부르는데, 이 『반야경』이야말로 대승 경전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전이다.
대승불교는 소승 교단이 부처님의 근본정신인 “일체중생의 구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소승 교단이 안고 있는 여러 모순을 지적하면서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의 선구 경전이 『반야경』이다.
『반야경』에 있어서 『반야심경』의 위치
『반야경』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현재 남아 있는 대승 경전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대승 경전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전이 바로 “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경이고, 이 『반야경』이 성립되어 문자화된 것은 대승불교의 발생과 거의 같은 시기인 서력기원 전후다. 이러한 『반야경』을 불교학자들은 (1)근본반야 경전 (2)잡부 반야 경전 (3)기타 반야 경전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의 근본 반야 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600부 『대반야경』, 『대품반야경』, 『소품반야경』이 있고, 두 번째의 잡부 반야 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금강경』이나 지금 논하고자 하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그 많은 경전 가운데 어느 경전이 가장 먼저 성립되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할 여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대승’이라는 말이 『금강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비롯해 대승불교의 모든 사상을 이 경전들이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유마경』은 『반야경』의 중심 사상을 드라마 형식으로 전개한 것이고, 『법화경』이나 『화엄경』도 각각 구성에 특색이 있지만, 사상적으로 말하면 『반야경』에 나타나는 여러 사상 가운데 몇 가지에 역점을 두어 보다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반야경』과는 전혀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토 경전까지도 『반야경』의 보살사상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 대승불교의 전 사상을내포하고 있는 『반야경』의 내용 중 가장 핵심만을 설한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그 많은 경전 가운데 어느 경전이 가장 먼저 성립되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할 여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대승’이라는 말이 『금강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비롯해 대승불교의 모든 사상을 이 경전들이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유마경』은 『반야경』의 중심 사상을 드라마 형식으로 전개한 것이고, 『법화경』이나 『화엄경』도 각각 구성에 특색이 있지만, 사상적으로 말하면 『반야경』에 나타나는 여러 사상 가운데 몇 가지에 역점을 두어 보다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반야경』과는 전혀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토 경전까지도 『반야경』의 보살사상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 대승불교의 전 사상을내포하고 있는 『반야경』의 내용 중 가장 핵심만을 설한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광본(廣本) 『반야심경』과 약본(略本) 『반야심경』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승불교의 선구 경전인 『반야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승 경전들은 구마라습(344~413) 삼장(三藏)이 한역(漢譯)했고, 지금도 그대로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동북아의 불교권인 우리나라, 일본, 대만을 포함한 중국에서 『반야심경』만은 현장(602~664) 삼장이 한역한 것을 유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마라습이 번역한 『반야심경』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구마라습이 한역(402~413)한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이 분명히 있다.
현존하는 모든 『반야심경』의 산스크리트어는 ‘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리다야 수트라(Prajña-pāramitā-hŗdaya–Sūtra)’이다. 이 산스크리트본(本)을 모본(母本)으로 일곱 종류의 한역이 있고, 이 일곱 종류는 또 광본(廣本)과 약본(略本) 『반야심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마라습과 현장이 한역한 것은 약본에 해당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경전의 성립에서 필요한 육성취(六成就)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육성취란 경전의 서분이 갖추고 있어야 할 여섯 가지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는 단서가 된다. 즉 모든 경전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해서 ‘어느 때’에 ‘부처님’이 ‘어느 곳’에 ‘누구’와 함께 계셨다는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을 신성취(信成就)·문성취(聞成就)·시성취(時成就)·주성취(主成就)·처성취(處成就)·중성취(衆成就)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고 있는 현장 역의 『반야심경』에는 육성취가 갖추고 있어야 할 서분도 없고, 경전의 결론에 해당하는 유통분도 빠져 있다. 오직 경전의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이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는 현장 역은 서분과 유통분이 생략된 약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동북아 불교권에서 출판되는 『반야심경』 해설서는 대부분이 현장 역의 약본을 모본으로 하기 때문에 광본 『반야심경』의 서분에 해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필자는 기왕의 『반야심경』 해설서들이 다루고 있지 않는 서분, 즉 이 경을 설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경전이 가지는 뜻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광본 『반야심경』을 우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광본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에 그 선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정종분이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고 있는 현장 역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반야와 이언 두 스님이 같이 번역(790)한 『반야바라밀다심경』을 통해 이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지면 관계상 서분에 해당하는 부분만 국역(國譯)으로 살펴보겠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 중에 계실 때 여러 대비구와 많은 보살들과 함께하셨다. 그때 세존이신 부처님께서 광대심심삼매(廣大甚深三昧)에 드셨다. 이때 대중 가운데 한 보살마하살이 계셨으니 이름을 관자재라 하였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다섯 가지 쌓임〔五蘊〕이 다 공(空)하였음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액을 여의었다.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합장 공경하고 관자재보살에게 사루어 말씀드렸다.
‘선남자시여, 만약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 행을 배우고자 하면 어떻게 수행해야합니까?’ 이렇게 묻자 그때에 관자재 보살마하살이 구수 사리불에게 말씀하였다.”
현존하는 모든 『반야심경』의 산스크리트어는 ‘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리다야 수트라(Prajña-pāramitā-hŗdaya–Sūtra)’이다. 이 산스크리트본(本)을 모본(母本)으로 일곱 종류의 한역이 있고, 이 일곱 종류는 또 광본(廣本)과 약본(略本) 『반야심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마라습과 현장이 한역한 것은 약본에 해당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경전의 성립에서 필요한 육성취(六成就)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육성취란 경전의 서분이 갖추고 있어야 할 여섯 가지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는 단서가 된다. 즉 모든 경전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해서 ‘어느 때’에 ‘부처님’이 ‘어느 곳’에 ‘누구’와 함께 계셨다는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을 신성취(信成就)·문성취(聞成就)·시성취(時成就)·주성취(主成就)·처성취(處成就)·중성취(衆成就)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고 있는 현장 역의 『반야심경』에는 육성취가 갖추고 있어야 할 서분도 없고, 경전의 결론에 해당하는 유통분도 빠져 있다. 오직 경전의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이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는 현장 역은 서분과 유통분이 생략된 약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동북아 불교권에서 출판되는 『반야심경』 해설서는 대부분이 현장 역의 약본을 모본으로 하기 때문에 광본 『반야심경』의 서분에 해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필자는 기왕의 『반야심경』 해설서들이 다루고 있지 않는 서분, 즉 이 경을 설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경전이 가지는 뜻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광본 『반야심경』을 우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광본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에 그 선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정종분이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고 있는 현장 역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반야와 이언 두 스님이 같이 번역(790)한 『반야바라밀다심경』을 통해 이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지면 관계상 서분에 해당하는 부분만 국역(國譯)으로 살펴보겠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 중에 계실 때 여러 대비구와 많은 보살들과 함께하셨다. 그때 세존이신 부처님께서 광대심심삼매(廣大甚深三昧)에 드셨다. 이때 대중 가운데 한 보살마하살이 계셨으니 이름을 관자재라 하였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다섯 가지 쌓임〔五蘊〕이 다 공(空)하였음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액을 여의었다.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합장 공경하고 관자재보살에게 사루어 말씀드렸다.
‘선남자시여, 만약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 행을 배우고자 하면 어떻게 수행해야합니까?’ 이렇게 묻자 그때에 관자재 보살마하살이 구수 사리불에게 말씀하였다.”
정종분(正宗分)의 구조
(1) 입의분(入義分)
정종분에 국한해서 보면 광본과 약본에 분량이나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또한 이 경전이 짧아 정종분을 다시 구조적으로 세밀하게 구분 짓기란 그렇게 용이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래로 몇몇의 주석가들이 나름대로 정종분의 구조를 밝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필자도 그중의 한 학설에 의거해 이것을 입의분(入義分)·파사분(破邪分)·공능분(功能分)·총결분(總結分)의 사분(四分)으로 나누되, 총결분은 생략하고 요점만 개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입의분은 경문의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다섯 가지 모임〔五蘊〕은 모두가 공하였음을 분명히 보고 일체의 고액을 건넜다”로 한자 25자까지의 범위를 말하는 것으로 『반야심경』의 대의, 즉 이 경의 핵심을 간략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경이 비록 260자로 설해지고 있지만, 이 입의분에 경의 전체적인 뜻이 담겨 있고 나머지는 이 25자를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입의분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곧 『반야심경』 전체를 이해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하에서는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반야바라밀다를 반야바라밀이라 칭함)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관자재보살로 되어 있다. 관자재란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인데, 구마라습(Kumarajiva)은 이 단어를 관세음(觀世音) 또는 관음(觀音)이라 번역하고 있다. 왜 이 원어(原語)가 두 가지로 한역되었는가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겠지만, 『반야심경』을 설하는 당사자가 자비(慈悲)를 상징하는 보살인 것에 착안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무엇 때문에 자비를 상징하는 관자재보살이 반야(般若)를 설하시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관자재보살이야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관자재보살로 상징되는 자비는 지혜와 더불어 대승보살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반야지(般若智)의 증득이 있을 때 자비는 매우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의 지혜란 너와 나, 나아가 천지 만물과 인간이 한 몸임을 깨달은 것을 말하고, 너와 내가 같은 몸임을 깨달았을 때만이 상대방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입의분은 경문의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다섯 가지 모임〔五蘊〕은 모두가 공하였음을 분명히 보고 일체의 고액을 건넜다”로 한자 25자까지의 범위를 말하는 것으로 『반야심경』의 대의, 즉 이 경의 핵심을 간략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경이 비록 260자로 설해지고 있지만, 이 입의분에 경의 전체적인 뜻이 담겨 있고 나머지는 이 25자를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입의분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곧 『반야심경』 전체를 이해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하에서는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반야바라밀다를 반야바라밀이라 칭함)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관자재보살로 되어 있다. 관자재란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인데, 구마라습(Kumarajiva)은 이 단어를 관세음(觀世音) 또는 관음(觀音)이라 번역하고 있다. 왜 이 원어(原語)가 두 가지로 한역되었는가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겠지만, 『반야심경』을 설하는 당사자가 자비(慈悲)를 상징하는 보살인 것에 착안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무엇 때문에 자비를 상징하는 관자재보살이 반야(般若)를 설하시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관자재보살이야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관자재보살로 상징되는 자비는 지혜와 더불어 대승보살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반야지(般若智)의 증득이 있을 때 자비는 매우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의 지혜란 너와 나, 나아가 천지 만물과 인간이 한 몸임을 깨달은 것을 말하고, 너와 내가 같은 몸임을 깨달았을 때만이 상대방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2) 파사분(破邪分)
파사란 삿된 사고방식이나 생각을 부수어서 없앤다는 말이다. 여기에 『반야심경』에서 가장 유명하게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물질적 존재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적 존재와 다르지 않다. 물질적 존재가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적 존재다”라는 법문이 나온다. 파사분에서 가장 중요한 법문은 이어지는 “이 모든 법은 공상(空相)이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라는 인간의 본래 성품,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정의다.
경에서는 “이 모든 것은 공상(空相)이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라고 설해, 공[인간의 본성]의 모양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본성의 영원성(永遠性)으로 우리들의 본래 생명은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으로 인간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청정성(淸淨性)을 말한다. 이 말은 영원한 인간 무죄(人間無罪)의 선언이다. 인간 본분, 진실면목은 실로 죄를 짓고자 해도 죄 지을 수 없는 청정자이다. 규정할 자가 없는 자존자(自存者)이다. 그는 영원한 자유자재자임을 선언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본성의 원만구족성(圓滿具足性)을 가리킨 것이다. 공인 인간 본성은 본래 완성이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공이다. 따라서 온갖 법이 공에 의해서 창출되는 것이다.
경에서는 “이 모든 것은 공상(空相)이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라고 설해, 공[인간의 본성]의 모양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본성의 영원성(永遠性)으로 우리들의 본래 생명은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으로 인간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청정성(淸淨性)을 말한다. 이 말은 영원한 인간 무죄(人間無罪)의 선언이다. 인간 본분, 진실면목은 실로 죄를 짓고자 해도 죄 지을 수 없는 청정자이다. 규정할 자가 없는 자존자(自存者)이다. 그는 영원한 자유자재자임을 선언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본성의 원만구족성(圓滿具足性)을 가리킨 것이다. 공인 인간 본성은 본래 완성이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공이다. 따라서 온갖 법이 공에 의해서 창출되는 것이다.
(3) 공능분(功能分)
공능(功能)이란 이 경전이 중생에게 베풀어주는 능력, 즉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공포가 없으며,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을 얻는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반야바라밀이 중생들로 하여금 걸림 없는 마음으로 인해 삶에 공포심이 없어지고 마침내 열반에 들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왜 반야바라밀이 이런 이익을 줄까? 경에서는그 이유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 Anuttarā-samyaksaṃbodhi의 음사로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든 오시지 않든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다. 이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불멸의 진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큰 위신력과 대지혜가 필경 여기에서 연유한다.
다시 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중생이 부처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것을 얻었을 때 지금까지 망념에 의해 가리어져 있던 진리의 실상이 드러나서 범부가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대승불교의 부처님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에 한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불보살님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한량없는 불보살님은 어떻게 계시는가? 『전등록』에는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인 마조(馬祖)와 그의 제자 방거사(龐居士)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법담을 전하고 있다. 방거사가 물었다.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에 마조가 대답했다. “네가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시고 나면[一口吸盡西江水] 일러주지.” 방거사는 이 말 아래 크게 깨달았다.
여기서는 반야바라밀이 중생들로 하여금 걸림 없는 마음으로 인해 삶에 공포심이 없어지고 마침내 열반에 들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왜 반야바라밀이 이런 이익을 줄까? 경에서는그 이유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 Anuttarā-samyaksaṃbodhi의 음사로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든 오시지 않든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다. 이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불멸의 진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큰 위신력과 대지혜가 필경 여기에서 연유한다.
다시 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중생이 부처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것을 얻었을 때 지금까지 망념에 의해 가리어져 있던 진리의 실상이 드러나서 범부가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대승불교의 부처님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에 한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불보살님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한량없는 불보살님은 어떻게 계시는가? 『전등록』에는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인 마조(馬祖)와 그의 제자 방거사(龐居士)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법담을 전하고 있다. 방거사가 물었다.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에 마조가 대답했다. “네가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시고 나면[一口吸盡西江水] 일러주지.” 방거사는 이 말 아래 크게 깨달았다.
혜담 스님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佛敎大學)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선우도량 공동대표,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재심호계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재는 불광법회 선덕으로 있다. 역저서로 『반야경의 신앙』, 『고따마 붓다의 정관명상』, 『진리란 무엇인가』, 『반야불교신행론』,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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