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4
자비가 가져오는
자기 치유의 효과
박성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
심리학에서 자비는 주로 긍정 정서나 이타주의와 같은 친사회적 행동과 관련해 연구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신경생리학적 측면에서 자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연구 또한 등장하고 있다. 심리 치료적 맥락에서 자비는 자기 비난적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다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치료 기술로 활용되기도 한다.
자비와 공감
자비를 유사한 개념인 공감(empathy)과 비교해보면 자비의 특성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공감은 타인의 느낌과 동일한 정서적 느낌을 공유하는 상태로서 타인의 느낌에 대한 ‘미러링’ 혹은 대리적 경험을 초점으로 한다. 공감은 핵심적인 사회-정서적 기술로서 공감의 결핍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는 데 문제를 야기한다. 공감은 매우 중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연구자들은 공감이 종종 공감적 고통(empathic distress)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병이나 사고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볼 때의 느낌을 회상해보면 공감적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감적 고통은 타인의 고통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를 일으킴으로써 자비와는 반대되는 행동을 이끌게 된다. 자비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특성을 포함하지만, 공감적 고통에 빠지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줄이려는 동기를 갖고 이타적인 행동을 이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실험 연구 결과 공감과 자비는 뇌의 발현 양상과 생리적 반응(얼굴 표정, 표현 행동 등)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타인의 고통에 노출될 때 공감적 고통은 심박률과 피부 전도를 증가시키고 뇌에서 부정적 정서 패턴을 보이며, 고통과 관련되는 얼굴 표정과 행동들(찡그리기, 몸을 뒤로 기울여 회피하기 등)을 보인다. 이에 비해 자비 반응은 심박률과 피부 전도가 약화되며 고통에 관여하고 협조하려는 표정과 행동 패턴(응시하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기, 터치하기 등)을 보인다. 공감적 고통은 자신의 고통을 감소하는 데 초점을 둠으로써 이타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줄이는 경향이 있지만, 자비는 외향적 초점(outward focus)과 적극적인 돌봄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또 다른 연구에서 자비 명상은 타인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조차 긍정적 정서를 이끌어냄으로써 회복 탄력성을 제공했다. 자비의 배양으로부터 나오는 긍정 정서는 타인과 보다 친밀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타인에 대한 돌봄을 동기화시키는 친화적 정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비는 공감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목격과 연결되어 있는 정서 상태이나, 자비는 고통스러운 느낌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안녕감과 사회적 연결성을 증진시키고 이타적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과 차별성을 갖는다.
자비의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
자비의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나, 최근 미주신경 긴장도(vagal tone)라는 개념이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미주신경(vagus nerve)은 심장박동, 혈압, 당 수치, 면역반응 등 대사 활동을 조절하는 자율신경으로서 특히 뇌와 심장의 밀접한 기능적 연결을 담당하는 신경이다. 연구자들은 자비 명상을 하면 미주신경이 활성화되며 이때 심장 주변 근육이 이완되어 가슴이 열리는 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주신경 긴장도는 미주신경의 활성화 정도를 의미한다. 미주신경 긴장도가 높을수록 심장의 건강 수준이 높았으며 회복 탄력성과 자기 조절력 또한 향상되었다. 또한 미주신경 활성화 정도가 높은 사람은 인지적 유연성이 높고, 긍정적 감정(기쁨, 평정, 희망 등)을 더 느끼며, 사교성이 향상되어 인간관계가 풍부하며 관계의 신뢰도 또한 높았다.
자비와 정신 건강
자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개념은 네프(Neff)라는 심리학자가 제안한 자기-자비(self-compassion) 이론이다. 자기-자비는 불교 지혜 전통에 근거해 개인적으로 취약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 대한 친절, 보편적 인간성, 마음챙김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에 직면할 때, 강렬한 자기-초점적 주의를 일으키며 그러한 상황에 과잉 동일시되면 터널비전(tunnel vision)의 상태에 빠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사고와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 또한 실패와 불완전성이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 고립감이 일어나며, 고통을 확장시키고 악화시킨다. 자기-자비는 약한 자신에 대해 친절하기, 인간은 결함 있고 불완전하며 실수를 통해 배우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기, 자신의 실패를 균형 잡힌 관점에서 봄으로써 부정적 사고와 정서에 마음챙김의 태도로 접근하기를 포함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자기-자비가 자기-존중감(self-esteem)과 대비되어 연구된다는 점이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자기-존중감(자존감)은 ‘중요한 삶의 영역에서 자신이 유능하다고 판단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자기-존중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평가에 의해 지각 된다.
인간은 자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신경생리학적 토대를 갖춘 존재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정서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을 피할 수는 없으나
그간 정신 건강 분야에서 자기-존중감은 정신 건강과 실제적으로 동일하게 취급되어왔을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었다. 자기-존중감은 행복과 낙관주의와 같은 긍정적 상태와 정적으로 연결되며, 우울, 불안과 같은 역기능적 상태와는 부적으로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기 위한 역기능적 행동들에 관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을 잘못된 것으로 거부하고, 자신의 실수를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외부적 원인으로 돌린다. 또한 높은 자존감 추구자들은 자신의 에고를 위협하는 사람을 향한 분노와 공격성이 높고, 편견과 차별에 기초한 하향적 사회 비교 경향이 높았다. 자기-존중감은 평가에 의존하므로 특정한 결과에 따라 변동되기 쉬우며 이에 따라 자기의 가치가 낮아지는 부정적 사건이 발생할 경우 우울증에 취약하게 된다. 높은 자존감 추구자들의 또 다른 문제는 병리적인 자기애와 관련되기 쉽다는 점이다. 이와 비교해 자기에 대한 자비로운 태도는 다양한 심리적 건강의 지표들과 정적으로 관련된다. 자기-자비는 삶의 만족, 정서 지능, 사회적 연결감과 정적으로 관련되며, 자기-비난, 우울, 불안, 반추, 사고 억제, 완벽주의, 섭식장애 등과는 부적인 관련성을 보였다.
자기-자비는 자기 가치에 대한 평가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측면들을 포용할 수 있는 개방적인 자각의 형태를 의미한다. 자기에 대한 자비가 높은 사람들은 자아를 방어하거나 증진시키려는 욕구가 낮으며, 부적절감을 판단하거나 평가하기보다는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존감은 자신이 특별하고 뛰어나다는 느낌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공적인 목표 성취에 따라 변동된다. 반면 자기-자비는 삶의 보편적 측면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며, 타인들과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더 초점을 두고, 결과와 상관없이 탄력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특성이 있다. 자기에 대한 자비는 타인에 대한 연결성과 안전감을 향상시킴으로써 안녕감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기-자비가 높은 사람들은 불쾌한 삶의 사건에서도 정서적 회복 탄력(emotional resilience)이 높으며, 자신의 수행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더 정확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자기에 대해 자비로운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굴욕적인 상황이나, 비호의적인 피드백, 혹은 과거 부정적 사건의 회상 시에도 덜 부정적인 정서 반응을 보이며, 부정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더 높게 지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기-자비는 어렵고 부적절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돌봄과 자비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므로, 자존감과는 달리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자기 평가적인 불안이 감소했다.
자비에 기초한 심리 치료 기법
자비 명상을 기초로 해서 심리학자들이 개발한 치료 개입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길버트(Gilbert)가 개발한 자비중심치료(Compassion Focused Therapy, CFT)와 네프와 거머(Neff & Germer)가 개발한 마음챙김 자기-자비 프로그램(Mindful Self-Compassion programme, MSC)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자비중심치료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자비중심치료는 수치심과 자기 비난 경향이 높은 만성적이고 복잡한 정신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개발되었다. 수치심과 자기 비난이 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따뜻함과 자비심, 그리고 위안을 주는 느낌을 갖는 것을 어려워한다. 자비중심치료에서는 이러한 이유를 자기를 진정시키는 중요한 정서 조절 시스템(affectregulation system)이 ‘꺼져 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뇌 속에는 최소 세 가지 유형의 정서 조절 시스템이 존재한다. 첫 번째, 위협과 자기 보호 시스템(Threat and selfprotection system)은 위협을 빠르게 탐지하고 대처 반응을 선택하는 기능이다. 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불안이나 증오, 혐오감 같은 폭발적인 감정을 일으키고, 이런 감정들이 몸으로 전파되어 우리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며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두 번째는 자원-추구, 추동-흥분 시스템으로서 이 시스템의 기능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찾도록 안내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장려하는 긍정적인 감정을 제공해준다. 세 번째는 진정, 만족 및 안전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진정과 휴식 그리고 평화로운 느낌을 일으켜, 균형을 회복하도록 도와준다. 이 시스템은 자비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안녕감을 느끼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수치심과 자기 비난 경향이 높은 사람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서 시스템은 과잉 활성화된 반면, 세 번째, 자신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정서 시스템은 저활성화되어 있다. 자비중심치료는 자비로운 마음 훈련(Compassionate Mind Training, CMT)을 치료 개입에서 사용한다. CMT는 자비 명상을 응용한 자비로운 이미지를 통한 심상 훈련과 마음챙김의 배양을 통한 정서 훈련으로 구성된다. 이 훈련의 일차적인 목적은 자신에 대한 따뜻한 느낌을 계발해 자신을 비난하는 태도를 줄이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CMT에서 사용하는 자비 심상화 기법에는 안전한 공간 심상, 자비로운 자기 계발하기, 자비로운 의자 작업, 자비로운 편지 쓰기 등이 포함된다. 자비중심치료는 만성적인 정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 우울, 자기-비난 성향을 개선하는 데 효과를 보였다.
자비로운 사람은 더 건강한가?
자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에 불과하지만, 자비가 정신 건강과 치유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상당한 정도의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자비는 원래 타인의 고통을 줄이고 돌보려는 정서와 동기이지만, 치료적으로는 자신의 괴로움을 자비롭게 대하고 돌보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를 돕는 삶은 세포의 염증 수준을 낮추고 행복감을 높여주며 질병으로부터 더 빠른 회복을 가져온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고통당하는 대상을 도우려는 마음을 낼 때 뇌의 쾌락 중추(pleasure centers)가 활성화된다. 우리 인간의 뇌는 받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도록 진화되어 왔다. 인간은 자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신경생리학적 토대를 갖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정서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을 피할 수는 없으나 자비의 훈련을 통해 본성에 내재한 치유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 자비의 계발은 자기중심성을 넘어 보편적인 인류애와 이타성이라는 인간 본성을 실현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박성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대 대학원 심리학과(상담심리)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문학 박사 학위를받았다.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 심리상담학과(자아초월상담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상담학회 선임이사, 한국명상학회 선임이사, 한국간화선연구소 연구위원, 하트스마일명상연구회 연구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자비, 깨달음의 씨앗인가 열매인가?』(공저)가 있고, 『자비중심치료』(공역), 『마음챙김에 근거한 심리치료』(공역)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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