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케 하리라 -경주 불국사

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케 한 불국사

권중서
문화학자·정견불교미술연구소장

불국사 청운 백운교(751년 추정)

영원불멸한 법신(法身)의 장소
『삼국유사』에서는 “절들은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란 말로 경주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불국사는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비유(譬喩)와 방편(方便)으로 ‘교만한 자는 교만을 멈추게 하였고, 제도하지 못한 이를 제도하며, 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케 한’ 『묘법연화경』의 설법 장소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추정 조성되었다.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숨결을 이역만리 인도에서 그대로 옮겨와 영원불멸한 법신(法身)의 장소로 남게 했다.

인도 영취산 『법화경』 설법 장소

당시의 신앙심은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라지기르〕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을 드러내어〔吐〕 신라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품어서〔含〕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었다. 토함산(吐含山) 불국사(佛國寺)이다. ‘신라가 곧 불국토(佛國土)’임을 증명하듯 인도의 영취산을 고스란히 경주 토함산에 옮겨놓았다. 경주 토함산(745m)과 인도 영취산은 산의 높이나, 돌이 많다거나, 왕궁으로부터 15리 떨어진 곳이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을 오르는 방향도 비슷하다. 토함산은 북동측이 높고 남서측이 낮아 인도 영취산〔기사굴산〕과 흡사하다. 삼장 법사 현장 스님(602~664)의 『대당서역기』에 보면 “궁성(宮城 : 왕사성) 동북으로 14~15리를 가면 기사굴산이 나온다. 산의 남쪽 기슭에 탑이 있는데 예전에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셨다. 그리고 큰 석실이 있는데 여래께서 이곳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다”고 기록했다. 8년간 『법화경』을 설한 기사굴산의 암대(岩臺, 탑, 해발 224m)와 불국사 석가탑·다보탑(해발 235m)의 고도 또한 비슷하다. 또한 영취산의 석실(石室)처럼 토함산 남쪽 기슭에 석굴(石窟)을 조성한 것 등 많은 것이 닮아 있어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성불한다는 법화사상을 지형적이나 조형적으로 보여준 곳이 경주 불국사이다.

불국사 연못과 청운·백운교 33계단
불국사 청운·백운교는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남기려고 사진을 찍는 유명한 장소이다. 그토록 사진을 찍어 마음에 담고자 하는 바람은 무엇일까? 내면 깊숙하게 감추어둔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말라(manas)식의 표출인가? 『불설장아함경』에 “욕계에는 11종류, 색계에는 18종류, 무색계에는 4종류의 중생이 있어 33중생세계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부처가 되려면 지옥에서부터 무색계까지의 33중생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서 청운·백운교의 가파른 33계단의 다리는 중생이 수행을 통해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조형으로 『법화경』 전반부 14품까지의 자력신앙(自力信仰)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불국사는 연못의 배를 타고 청운·백운교 다리를 건너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불국사」란 시의 일부를 보면 불국사 가는 길은 참으로 풍광명미(風光明媚)했을 것이다.

연꽃 위 물가를 걸어서 들어가니(步入蓮花上)
향기는 바람 따라 옷에 스며드네(香風襲我裳)
폭포수는 소리 내어 나무를 깎고(飛泉刳木咽)
돌다리는 무지개 띠 길게 둘렀네(石橋帶虹長)

연못을 지나는 것은 번뇌를 씻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고, 다리는 『불설보살내습육바라밀경』에 “법의 다리〔法橋〕를 놓아 모두를 법문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 그래서 이 불국사의 계단을 다리라 한 것이다. 또한 『대방광불화엄경』에 “연못을 만들어 무지의 바다에서 법의 배를 타서 번뇌를 끊고, 구름다리를 만들어 욕의 바다를 건넌다”는 내용을 구체적인 조형으로 표현한 것이 불국사 연못과 청운·백운교 다리이다.

(왼) 불국사 석가탑(751년 추정) (오) 불국사 다보탑(751년 추정)

석가탑과 다보탑
33중생세계를 끝까지 오르면 불국정토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자하문(紫霞門)이 있고 들어서면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탑으로 화현(化現)해 여래의 법신은 영원불멸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석가모니부처님을 상징하는 서쪽의 석가탑을 보자. 영취산처럼 자연 암반이 솟아오른 곳에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을 세웠다. 탑을 둘러싼 8송이 연꽃은 『법화경』 청문(聽聞) 8대 보살이 앉는 자리로 보살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법화경』을 듣고 있음을 표현해 사실성을 더하고 있다.

석가탑을 다른 말로 ‘무영탑(無影塔 :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 한다. 설화의 내용에는 ‘탑을 쌓을 때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그리움에서 비롯되어 탑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설화일 뿐 교리적인 해석은 아니다. 태양 자체엔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부처님 또한 태양과 같은 존재로 그림자가 없다는 의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말한 영원불멸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다.

(왼) 불국사 세존사리탑(고려 초) (오) 불국사 대웅전 삼존불(1769년)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동쪽을 향해 『법화경』을 설하시자 동쪽에서 다보여래가 땅속에서 탑으로 솟아오른 조형이 다보탑(多寶塔)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이 하나 있으니 이 탑은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보물로 장식되어 있으며 5천 개의 난간(그래서 다보탑에는 난간이 있다)과 천만의 방이 있으며, 이때 보배탑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찬탄하여 말하길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도다.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법화경』으로 대중을 위하여 설하시니, 석가모니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니라’ 하였ㅌ.” 다보탑은 수많은 보배로 장엄된 탑이란 이름에 걸맞게 석가탑과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공중에 머물러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기단 사방 4곳을 계단으로 표현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 계단을 통해 뛰어올라 공중에 떠 있는 다보여래와 자리에 함께하셨다. 이로 인해 2불 병립상이나 병좌상이 유행하게 되었다.

불국사의 또 다른 다보탑, 세존사리탑
불국사에는 또 다른 다보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비로전 서편 보호각 안에 있는 세존사리탑이 고려 초에 조성된 다보탑이다. 이 다보탑은 배가 부른 타원형으로 4면에는 각각의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속에는 항마촉 인의 석가모니불과 설법인의 다보여래가 2불 병좌(二佛竝坐)의 모습으로, 석가모니불 우측에 범천이 긴 불자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선 채로 합장하고 있으며, 다보여래의 좌측에는 제석천이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협시해 있다. 중대석의 영기문(靈氣紋)은 탑이 허공 가운데 솟아 있음을 표현했다. 이 다보탑은 일제 강점기인 1905년에 불법 반출되어 일본 동경 우에노공원에 옮겨졌다가 1933년에 다시 불국사로 반환되었다. 이 탑은 2불 병좌상이 새겨진 유일한 다보탑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존불
『대지도론』에서는 “기사굴산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 머무르는 곳”이라 했다. 기사굴산처럼 불국사 대웅전에도 과거·현재·미래의 삼존불이 계신다. 본존 석가모니불은 특이하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 아닌 설법인(說法印)인데 그 까닭은 불국사가 『법화경』의 ‘상주설법처(常主說法處)’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삼존불은 조선 영조 45년(1769)에 조성해 모셨는데 바라보아 좌측에는 제화갈라보살을,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우측에는 미륵보살을 배치해 불국사는 삼세의 부처님이 머무는 영원불멸한 공간임을 표현했다. 그 옆에는 젊은 아난과 늙은 가섭 존자를 배치해 영산회상을 느끼게 한다.

불국사는 인도 영취산과 토함산의 만남, 중생과 부처의 만남,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무엇보다도 바른 백련(白蓮)과 같은 가르침’인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부처님의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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