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와 공(空)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회장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공(空)이라는 말은 많이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공이라는 말이 마치 불교의 대명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유행가 가사나 대중적인 시구에서도 가끔 공을 들먹이며 세상의 허무를 말하기도 한다. 공이라고 하면 왠지 텅 빈 느낌이 나고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공과 무(無)를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한 혼동 때문에 불교라고 하면 염세적이고 허무를 강조하는 종교인 양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교를 비난하는 일부 타 종교인들 중에는 이런 점을 들어 불교를 염세적이며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에 대해 잘 알게 되면 그런 말은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공이야말로 연기(緣起)라는 말과 함께 불교를 대표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연기는 직접, 간접의 원인이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조건에 의해 사물과 현상이 발생, 소멸하며 변화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자체가 연기의 세계다. 이 우주는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다만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서로 의지하면서 변화해가는 그러한 세계다. 이러한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하는 원인과 조건이 변화하거나 없어지면 존재 자체도 변화하거나 없어진다. 부모가 없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이 자식이 있을 수 없다. 시간적으로도 그렇지만 공간적으로도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란 존재가 있게 된다. 관계 속에서 나는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되고, 회사원도 되고, 선생님도 되고 학생도 된다. 흰색이 있기에 검은색이 존재하며 긴 것이 있기에 짧은 것이 존재한다. 큰 것은 더 큰 것이 나오면 그때부터 작은 것이라 불린다. 이런 이치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우주가 곧 연기의 세계다. 그리고 그러한 상관관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나’라는 실체가 있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그대로 영혼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연기라는 진리에 기반을 두고 ‘무아’를 말한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는 영원불변하는 나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다.
조금이라도 관찰력, 사고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존재나 현상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존재나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처럼 나를 포함한 이 우주가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그것이 곧 공(空)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인과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모습이 변화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연기에 의해 나타나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인 것은 모두 연기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물이 뜨거워지면 수증기가 되어서 증발하고 더 차가워지면 얼음이 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고 물이다, 수증기다, 구름이다, 얼음이다 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 사실뿐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을 진리라고 한다. 불교적인 용어로 이것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인연으로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며, 무위법은 인연화합이 아닌 변함없는 진리의 세계다.
무위법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 논리적 연기가 무수히 교차하는 가운데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찰나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구불변한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한다. 우리가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은 그것과 관련된 하나의 연(緣), 혹은 관계성 내지는 조건이 변화하면 이내 형태를 바꾸어버린다. 그 존재가 의존하고 있는 조건이 변화하거나 소멸하면 존재 자체도 변화하거나 소멸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태를 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연기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그 상태가 곧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만 공이 이해가 된다. 따라서 연기는 공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공으로서 고정된 실체나 본질 혹은 본성을 지니지 않는 것을 자성(自性)이 없다고 하며, 이를 무자성(無自性)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그냥 무(無)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연기에 의한 존재는 무수한 인연과 상호 의존의 조건에 의해 찰나적으로 그렇게 나타날 뿐이다. 그러한 인연과 상호 의존의 조건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데 따라 잠시 존재의 형태를 띠고 있던 그것도 변화하고 소멸한다. 이것은 모든 사물이 실체나 자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고정불변의 실체나 자성이 있다면 그러한 사물이나 현상은 조건이 변화해도 그대로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것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연기란 모든 사물이나 현상의 존재 방식 내지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존재란 유위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 즉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러한 상태의 조건이 변하면 따라서 변하는 존재다. 앞에서 예를 든 물과 얼음, 수증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그것이 법칙 내지 원리로서 취급될 때에는 연기라고 부르며, 그러한 법칙 내지 원리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그 상태가 곧 공인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연기와 공은 같은 것에 대한 관점(觀點)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연기가 되고 공이 된다. 따라서 연기에 의한 존재는 반드시 공이며, 동시에 공이라고 하는 것은 곧 연기에 의한 존재를 말한다. 연기와 공은 마치 손등과 손바닥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성이나 실체를 지니지 않고 무수한 직간접의 원인과 서로 의존하고 있는 여러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찰나적으로 변하고 있는 상태의 본질이 곧 공이다. 즉 연기로 이루어진 세계의 상태가 바로 공인 것이다. 그리고 공이기 때문에 연기에 의한 세계의 생멸 변화가 가능하다. 컵이 비어 있기에 물을 채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책이나 책상도 또 그것을 보고 있는 나 자신도 사실은 찰나찰나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착각이 중생들의 탐욕과 집착으로 이어진다. 불교에서 공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분명한 현실을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고통의 근원이 되는 탐·진·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과 사물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나타나지만 그것 또한 곧 사라질 공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이기 때문에 빈 잔에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또 다른 사물과 현상을 나타낸다. 공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적멸이나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의미가 아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공의 실천이 곧 중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공의 의미를 잘못 해석해 일체가 공이라면 선이 어디 있으며 악이 어디 있는가라고 하면서 막행막식을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면 거리낄 게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허무주의에 빠져 계행도 무시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다가 파멸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것은 공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생각해 인과라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공이 연기에 바탕을 둔 제법(諸法)의 실상을 밝힌 것임을 모르고 공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해석했기 때문에 도리어 공에 얽매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에서 공의 도리를 말하는 것은 모든 집착을 벗어나 마음의 안락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도리어 공을 잘못 해석해 스스로의 발전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공의 실천으로서의 중도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까 이를 잘못 해석해 자기의 입장을 애매하게 한다든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양비론(兩非論)적인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도 애매하거나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는 또 하나의 견해나 태도에 집착하는 그릇된 공견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로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본성이 공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늘 변화시켜나갈 수가 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좋은 인연을 만들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한 것을 모르고 공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이해해 좋은 방향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든지 혹은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매사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도리어 공에 얽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공집(空執)이라고 한다. 특히 공을 허무적으로 이해해 만사를 부정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한다. 불교 공부의 방향을 잘못 잡아 이런 악취공에 빠진 사람은 구제할 길도 없다. 자기 나름대로는 불교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말을 해주어도 요지부동이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잘 가르쳐줄 수 있지만 불교 공부를 어설프게 해서 악취공에 빠진 사람은 아집이 있어서 남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하면서도 자신을 성찰해 혹시나 자신의 배움이나 믿음에 오류는 없는가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 불교 공부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연기와 공을 더 잘 이해하고 체득하면 집착과 탐욕을 벗어나는 데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세상, 이 우주의 근본 원리를 알고 있다면 거기에 맞추어 살면 된다. 그것이 곧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것이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철학 박사). 전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총지종 중앙교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근본불교개설』, 『현대인을 위한 불교 입문』, 『불교 교양으로 읽다』, 『내 인생의 멘토 붓다』, 『관세음보살 예찬문』, 『초발심자경문』, 『대일경 주심품』, 『생활불교, 재가불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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