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운명이 바뀝니다
임웅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로봇을 만드는 공학도가 되고 싶었다. 초능력 만능 로봇은 어린 나의 꿈이었고, 내겐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내 색각(色覺)에 이상이 있었다. 이과와 문과로 반을 나누는 고등학교 3학년 진급을 앞두고, 나는 안과 전문의로부터 정밀 진단을 받았다. 색맹이라는 판정이 났다. 당시에 색맹인 사람은 이공계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꿈이 조각나 좌절한 나는 대학입시에 떨어져 재수생이 되었다.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야 했기에 분발해 열심히 공부했다. 공대를 갈 수 없었던 나는 문학이 하고 싶어서 문리대에 지원하려고 했다. 부모님과 친지들이 반대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문학을 해서는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뼈저린 가난을 체험한 부모님 세대는 하고 싶다거나 적성에 맞아서 대학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좋은 분야로 진학하는 것을 교육의 정석으로 삼았다.
나는 사회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법대에 들어갔다. 내게 법학은 재미없는 학문이었다. 하기 싫은 사시 공부에 억지로 매달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어찌어찌 하다가 법대 교수가 되었다. 법학은 내 학문 혼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책임감과 직업관만큼은 비교적 굳건해서 교수 생활을 그런대로 성실히 꾸려나갔다.
교수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자마자 문학도가 될 결심을 했다. 그 후 7년 동안 장편소설 세 권과 단문집 한 권을 썼다. 문학 출판사 문을 두드려보았으나 무명작가에 대한 냉기를 감지하고서 네 권 모두 자비로 출판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책은 팔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엔 기가 꺾였다. 개인적으로 글쓰기가 재미있기는 해도, 출간한 저서가 독자들에게 인정받고 잘 팔려야 신이 나는 법이다. 강아지는 주인의 손길로,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로, 예술가는 관중의 박수소리로 활기를 얻는다. 관중 없이 혼자 춤추던 나는 작가로서 맥이 빠졌다.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희미한 존재로 생을 마감한 예술가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2020년 초 이래로 코로나19 사태라는 직격탄을 맞고 수많은 예술가와 운동선수가 쓰러졌다. 그들은 쓰러진 방 안에서 홀로 눈물 흘리며 신음한다. 공연과 전시가 중단되고, 심지어 4년간 각고면려(刻苦勉勵) 고대하던 올림픽 경기마저 연기되니, 그들이 얼마나 실의에 잠기어 있겠는가! 그들을 생각하면 내 문학서가 홀대받는 것은 생채기 정도에 불과하다.
활기를 잃은 나는 생활에 변화를 시도했다. 금년 초 월정사가 있는 평창군 진부면에 시골 땅을 조금 샀다. 정착과 농사를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일이 엄청나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길을 닦고, 수도와 전기를 끌어오고, 농막을 얹고, 밭을 갈아 파종하고 모종을 심었다. 잡초 제거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처음 하는 일이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가르침을 청해 들었다. 농사에 관한 한, 나는 학생으로 돌아갔다. 배우고 익히고 힘썼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여생을 새로이 열어가는 개척자였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늙은 나는 무모한 사고뭉치였다.
농사가 힘에 부쳐도 즐거웠다. 농사를 잘못 지어도 결과를 기꺼이 감수하면 되니까 마음이 자유로웠다. 나는 요즈음 TV 인기 프로의 주인공인 자연인이면서 자유인이고 돈키호테다.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접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고, 삶의 터전은 시멘트가 아니라 흙이다. 종일 발을 흙에 딛고, 손에 흙을 묻히고 산다. 파종・모종한 농작물이 성장하는 나날을 지켜보며 생명의 신비에 감격하고, 숲에서 꿈틀거리는 야성을 받으며,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심오한 자연 세계 속으로 잠긴다. 햇볕에 온몸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천지간의 기운을 받는다. 농사일에 지쳐 말할 힘조차 없을 정도로 쓰러져 잠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새벽 일어나는 몸에 활기가 뻗친다. 나는 자연이 주는 생명력에 몸과 마음을 맡긴다.
임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31년간 재직한 후, 현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전공 서적 이외에 장편소설 『영성지수(靈性指數)』, 단문집(短文集) 『센타크논 전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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