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을 가꾸다 |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밭을 가꾸다


김승현 

그린 라이프 매거진 『바질』 발행인



상추와 애벌레

10년 전 어머니가 오래된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가셨다. 각 아파트 동은 사방이 텃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 모습에 눈을 반짝이셨다. 1946년에 태어난 어머니는 그 시절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시골에서 자랐고 직접 길러 먹는 것이 당연했다.  

어머니는 이삿짐이 정리되는 대로 가장 먼저 자신에게 할당된 1평 남짓한 그 공간을 채소를 기르기 좋도록 보고 배우신 대로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땅에 구멍을 내고 다른 채소와 함께 상추를 심으셨다. 이제 아침에 주요한 일상은 이곳을 돌보는 일이 되셨다. 며칠 지나고 촉촉한 땅에 상추 싹이 하나 올라오더니 그 뒤를 이어 서로 경쟁하듯이 싹들이 올라왔다.  

어머니의 정성만큼 날로 자라나는 상추밭에 이름 모를 꽃들도 피어나면서 텃밭은 더 풍요로워졌다. 나비가 날아들고 상추들이 모습을 갖춰가던 어느 날, 상추를 갉아 먹는 연둣빛 애벌레들이 등장했다. 나날이 통통하게 커져가는 애벌레만큼 상춧잎은 빠르게 고갈되어갔다. 애벌레의 수는 늘었다. 어머니와 나는 벌레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처음 해보는 애벌레와의 접촉이었기 때문에 덜덜 떨면서 나무젓가락으로 꿈틀대는 애벌레를 잡아 들고는 1m 떨어진 꽃들만 자라는 화단으로 옮겨주었다. 나름 ‘여기라면 이들도 먹고 살 만할 것이다’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 언제 꽃밭에 갔었느냐는 듯이 애벌레의 수는 복원되어 있었다. 우린 다시 애벌레를 옮기기를 반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우리가 매일 젓가락을 들고 상추에서 애벌레를 떼어 이사시키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 동네 할머니가 계셨다. 우리가 너무 안타까워 보이셨는지, 그날은 지나가시다가, 잠깐만 기다려보라며 밭에서 농약을 뿌릴 때 쓰는 손 분무기를 하나 가지고 오셨다. 이것만 뿌리면 간단하다고 하셨다. 열흘 넘게 벌레를 잡느라 조금 지쳐 있기도 했던 우리는 한번 사용해보기로 했다. 사실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농약을 뿌리면 애벌레들이 농약을 피해 잽싸게 도망갈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농약을 뿌린 후 텃밭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떻게 되는지 관찰했다. 애벌레들은 우리가 예상한 모습과 움직임이 달랐다. 농약을 뿌리는 순간 서서히 움직임이 정지되더니, 연둣빛을 잃고 점점 잿빛을 띠며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어느 순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다시는 이걸 쓰지 말자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며칠 동안 우리 상추밭에서는 통통하고 식욕을 자랑하는 애벌레들을 볼 수 없었다. 애벌레들과 숨바꼭질하던 상추밭은 이제 생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는 후회가 계속 밀려왔다. 상추가 잘 자라는 것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았다. 또 이렇게 키운 상추가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우리야 텃밭에서 상추를 키우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사 먹는 상추는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다시 애벌레들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할머니가 농약을 권해도 다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벌레들도 귀찮고 우리도 귀찮겠지만 ‘젓가락 전쟁’을 택했다.


생명이 연결되는 공간, 땅

애벌레와 우리가 벌였던 먹이 경쟁은 서로 살기 위한 행위였다. 우리에게는 상추가 먹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였지만 애벌레는 살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각자가 먹을 것을 먹을 만큼 기르는 환경이었다면 인간은 애벌레에게 유연성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먹거리 생산이 대부분의 개인으로부터 분리되고 제품으로 산업화되어 재배되면서, 상품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게 되었다. 애벌레를 비롯해 곤충, 새 등 야생 동물로부터 상품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농작물들에 많은 농약을 뿌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농약 사용량은 1헥타르당 11.8kg으로, 농약 사용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4.5배가 넘는다. 예전과 달리 잔류 농약이 기준치를 넘지 않도록 농약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먹는 작물들이 자라는 곳의 생명 환경은 어떨까? 또 우리의 일정에 맞게 강제적으로 비료를 투입해 빠르고 크게 자라나게 한다. 이것은 과연 생명을 지키는 길일까?

토양은 반지름 6,000km가 넘는 지구 표면을 1m 두께로 덮고 있다. 토양에서는 식물이 자랄 뿐만 아니라 미생물을 포함한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간다. 이곳에 강이 흐르고 비가 내려 물을 공급하고 바람이 영양소와 토양을 실어 나른다. 동물이 먹고 살아가고 죽으면서 이들이 다시 토양의 영양분이 되고 많은 생물의 먹이 근간이 되는 식물이 자라난다. 서로 순환하면서 생물들이 먹을 것을 길러낸다. 생태계의 견고한 인연법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데, 견고한 만큼 깨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놓칠 때가 많다. 토양균이 많을 때 땅은 비옥해진다. 토양균은 식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땅속으로 빨아들여 식물의 뿌리로 보내줘 식물이 생장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화학비료를 땅에 뿌리면 토양균의 먹이와 역할이 감소해 토양균이 줄어들고 땅은 황폐해진다. 땅이 황폐해지다 보니 다시 더 많은 비료를 사용하게 되고 이는 더 땅을 고갈시킨다. 그 땅은 더욱더 생명이 살 수 없게 된다. 농약도 그러하다. 인간의 기준으로 해충이 되는 벌레를 없애기 위해 농약을 치는데, 농약이 궁극의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상식이다.


땅이 건강해야 함께 건강해진다

집에서 화분 분갈이를 해본 사람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갈이할 때쯤이면 화분 속에 흙은 사라지고 그 속에 뿌리가 가득한 것을 말이다. 결국 그 흙을 먹고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 화학약품으로 키워낸 것이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다. 우리가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먹는 행위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다른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생명은 다른 생명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먹는 다른 생명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 생명이 자라날 양분의 토대가 건강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 또한 건강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식물이 인간이 먹는 것의 시작이라면, 그 식물이 자라야 하는 땅이 건강해야 결국 우리도 건강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땅이 건강하려면, 유기농과 같이 땅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은 비단 인간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생력을 키운 땅에서 자란 작물을 먹는다는 것은 땅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된다. 또한 땅이 건강해진다면 땅이 가지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포집 능력을 키워, 우리의 당면 과제인 기후 위기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 즉 땅이 건강해지는 것은 사람과 지구가 건강해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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