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천 거사 | 다시 쓰는 재가열전

다시 쓰는 재가열전|세속에 핀 연꽃


민병천 거사 

정직과 불심(佛心), 그리고 

인욕보살의 삶


정병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민병천(1932~2011)
법명 성암(惺庵).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 원 정치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 다. 동국대 교수 및 동국대와 서경대 총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북한연구소 이사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을 역 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정치학』, 『한국안보론』, 『북한 평화 그리고 통 일』, 『한반도 평화의 길』, 『장벽을 넘 어 통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민병천(1932~2011) 교수는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경동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나왔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총장과 서경대 총장을 비롯해 통일문제연구소 이사장과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현대 재가 불자 중의 한 분이다. 나는 그분과 교수 생활을 같이했고, 또 민병천 교수의 총장 재직 시절에 교무처장직을 수행하면서 그분을 도왔다. 온화한 성품과 이지적인 판단력으로 역경을 극복했고 뛰어난 친화력과 솔선수범으로 조직을 이끌었기 때문에 늘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던 분이다.


동국대의 안정을 이루다

동국대학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립 대학이다. 불교적인 이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해온 특이한 조직이다. 수많은 미션 대학들에 맞서 불교의 자존심을 지켜온 유일무이한 대학이고, 100년이 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닌 자존심 높은 학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립대학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시끄러운 곳이기도 하다. 모든 사립대학은 설립자가 있고, 그 설립 법인이 대학 운영의 주체다. 그런대 동국대는 주인이 ‘부처님’이다. 그러다 보니 주체가 불분명하고 책임 소재도 명확하지 않다. 

민병천 총장이 취임하기 전에는 동국대가 심각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총장 직선제를 둘러싸고 재단과 교수회, 직원 노조, 학생회, 동창회 등이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급기야 총장 공백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 총장이 취임했지만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그분은 대학의 주체들을 설득해야 했고, 대학의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총장을 하려고 난리지만, 총장직은 3D 직종 가운데 하나다. 학생들은 걸핏하면 총장실을 점거하고 수업 거부 데모를 벌였고, 교수 사회는 이 문제에는 냉담하면서 학교 집행부 공격에만 열을 올린다. 급기야 재단의 총장 견제가 시작되면, 총장은 식물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이 계속되면 결국 대학은 최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민 총장은 그 어려운 길을 차근차근 수행하면서 교수와 학생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분의 노력 덕분에 동국대는 안정과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그분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서 뛰어난 학술적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특히 ‘안보’라는 새로운 주제로 주목을 받았다. 남북 교류는 통일의 지름길이지만, 그를 위해서 선행해야 할 분야는 바로 안보임을 주장했다. 그가 교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학과를 개설한 것 또한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북한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연구라는 상징성과 함께 북한을 이해하는 창구로서의 선견지명이 낳은 결과였다.


글로벌한 감각이 대학의 미래를 결정한다

대학 운영의 주체는 교수다.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최전선에 있지만, 학생들을 훈화하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직책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교수는 철밥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10여 년 넘는 케케묵은 이론과 교재로 시간을 때우는 강의 또한 다반사였고, 논문 표절 역시 단골 메뉴였다. 

그분은 신규 교수를 뽑을 때 철칙이 있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했거나, 선진적인 연구에 종사한 경험을 높이 샀다. 사실 동국대처럼 오래된 학교는 자신들의 영역을 최고로 느끼고, 다른 충고나 연구 결과들을 쉽게 수용하지 않는 독불장군이 되기 쉽다. 그것을 과감히 깨기 위해서는 타교 출신과 새로운 연구 방법의 도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해외의 자매 대학들을 높이고, 교수와 학생을 파견하는 일 또한 매우 중시했다. 교수 강의에 영어를 도입한 것도 최초였다.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고, 그것은 대학 구성원들의 글로벌한 감각을 높이 진작하기에 충분했다. 


녹원 스님과의 각별한 인연

그분은 재직 시에 지관 스님, 현성 스님 등과 교유했는데 녹원 스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다. 녹원 스님은 동국대의 이사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민 총장과는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큰 불화 없이 많은 과제들을 함께 풀어갈 수 있었던 요인은 두 분의 신뢰 때문이었다.

우선 녹원 스님은 종단 안팎의 외풍(外風)을 철저히 차단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셨다. 학교 운영은 총장의 역할이고 재단은 그것을 돕는 기구라는 생각이 강했다. 인사에도 개입하지 않았고, 어려운 학교 재정을 돕는 일에만 신경을 써주셨다. 

민 총장 또한 법인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라주었기 때문에 학교 내부의 잡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민 총장은 업무 일 이외에도 주말에는 자주 직지사를 참배했고, 스님과 함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불교 집안 이야기 등을 스스럼없이 나누었다. 녹원 스님은 종단의 큰 어른이었지만, 사석에서는 퍽 따스하고 인간미 넘치는 분이셨다. 두 분의 만남은 아름다웠고 배울 점이 많은 대화로 가득했었다. 

대한불교진흥원의 이사장으로서 재직할 때에도 민 총장의 처신은 합리적이었다. 당시 『불교방송』과의 불화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였지만,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양자의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 

그분은 진흥원이 『불교방송』을 후원하고 도와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불교 발전의 외연을 넓히는 일 또한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를 위해서는 불교계에 대한 지원 사업이 다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법당에 대한 지원, 원효학술상 제정, 불교 음악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등은 모두 그분의 결단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된 중요한 진흥원의 사업이 되었다. 또 숨도빌딩, 서강빌딩을 매입해 진흥원의 자산을 넓힌 일도 그분의 치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나는 그분에게 총장 수업을 다년간 받은 셈이다. 그분은 나에게 인욕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결단의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결단을 내리면 반드시 이익을 보는 이도 있지만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편도 있게 마련이다. 그 비난과 모함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을 이기는 비결은 바로 정직과 불심(佛心)이다. 이 두 가지를 명심하면 좋은 총장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해주셨다. 나의 4년 총장 시절뿐 아니라 아직까지 내 가슴에 새겨진 그분의 여운이다. 

나는 그분과 30여 년의 깊은 인연을 이어왔지만, 한 번도 그분이 성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온화하면서도 검소했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참 불자였다. 



정병조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영남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네루(Nuhru)대 교수 및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동국대 부총장, 불교학 연구회 회장, 금강대 총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불교방송(BBS)』 라디오 프로그램 <무명을 밝히고>를 오랫동안 진행했고, 지금은 경전 강의 프로그램인 <다르마 산책>을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철학사상사』, 『불교문화사론』,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불교강좌』, 『반야심경의 세계』, 『현대인의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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