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3
그리스도교의
자살 이해
심현주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희망 속에 살아나는 삶의 의지
촛불혁명이 일어난 해, “이게 나라냐”라고 밖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은 기필코 나라를 바꾸고자 했다. 그것은 상식 있고 살맛 나게 하는 나라에 대한 희망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3년이 지날 즈음 우리나라 자살률이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10여 년간 OECD 국가들 중 줄곧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까지 쓰지 않았던가. 정권이 바뀌고 사람들은 이제야 정말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여기저기 믿을 만한 소식통을 뒤지고 있을 때, 어느 신문에 ‘한국인 자살률 1위’라는 기사가 났다. 다시 1위, 역시 우리는 나라를 바꾼 것이 아니라, 고작 정권을 바꾸었구나! 바뀐 정권은 아직 살맛 나는 나라를 만들지 못했구나!
희망은 삶의 고통을 이겨내며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힘이다. 희망은 고통스러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성장한다. 반대로, 고통스러운 삶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고 판단되면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친다. 인지상정이다.
자살은 ‘죄’인가?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자살을 죄라고 규정해왔다. 신으로부터 받은 존엄한 생명을 피조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죄요,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의 영역에 침입한 것이 죄다. 그리스도교에서 자살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에 의해 처음 단죄되었다. 그는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근거로 자살을 엄격하게 단죄했다. 자살은 나에 대한 살인이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신학대전』에서 자살에 반대하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자살은 각자 빚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며, 둘째로 자살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고, 셋째는 자살이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영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오직 신에게만 속하는 권한을 사취하는 신에 대한 범죄다. 가톨릭교회는 A.D 6세기부터 자살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생명에 관한 하느님의 권한을 사취한 자에게 교회장의 혜택을 박탈했다.
19세기 정신의학과 사회학 차원에서 자살의 원인이 규명되면서, 자살에 대한 다른 관점들이 생겨났다. 이제껏 개인적 차원의 윤리로 생각해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자를 죄인으로 낙인찍었다면, 과학적 연구는 자살의 원인을 사회적 조건으로 규명했다. 자살이 개인적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 전환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자살인가? 아니면 사회적 타살인가?라는 문제는 시국과 관련해 자신의 삶을 바친 젊은이들로 인해 한때 뜨거운 감자였다. 그들의 죽음은 ‘죄’인가? 아니면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가장 큰 사랑’(요한,15,12)인가? 자살에 대한 일방적인 논리가 성립되기 어렵다.
왜 스스로 파멸하는가?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일상의 뉴스가 되었을 때, 우울증이라는 병도 함께 주목받았다. 한국의 의학계가 자살의 주요 원인을 우울증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자살자가 자신의 의지와 행위를 통제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압도적 상황인 것이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설명은 교회가 자살의 유형을 분리하고, 어떤 죽음에 준 장례식을 허락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 자살을 이해한다. 곧, 개인의 의지와 행위를 윤리 규범으로 삼는다.
우울증이 자살 행위와 상관관계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수많은 자살 유형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에밀 뒤르켐(E. Durkheim, 1858~1917)이 분석한 자살 유형은 세 가지로 함축할 수 있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성 자살이다. 이기적 자살은 통합적 기능을 상실한 사회에서 쉽게 발생한다. 응집력을 잃은 사회는 개인에게 삶의 고통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종식시킬 권리를 인정하는 셈이다. 이타적 자살은 어떤 사회적 명분이나 목적에 자신을 희생시키는 현상이다. 이타적 자살은 다시 의무적 이타적 자살, 자발적 이타적 자살, 극심한 이타적 자살이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사회집단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마지막 유형은 아노미성 자살이다. 이는 사회의 규제 작용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력을 밝힌다. 사회적 규제는 개인들의 제한 없는 자아 만족 욕구를 규제해, 사회 공동선을 추구하는 작용을 한다. 사회가 규제력을 잃게 되면, 구성원들의 욕구를 조절할 수 없게 되며 공동체 규범은 와해되고 사회는 안전판 역할을 하지 못한다. 개인들의 욕구는 무규율 상태, 곧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끝없는 욕망을 쫓게 되고 무절제한 경쟁을 하게 된다. 끝없는 욕구 충족은 끝없는 좌절을 불러일으키고 삶의 동기는 상실된다. 끝없는 욕구를 쫓는 사람이나, 그 대열에서 낙오된 사람들 모두 불안한 삶의 조건으로 내몰린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진다.
자살이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신문 기사에 따르면, 2020년 20대 여성 자살 시도율이 그 전년보다 34%나 늘었다. 코로나 환자 응급실에서 확인된 자살 시도자도 20대가 제일 많았으며, 20대 남녀 모두 증가율이 1,2위였다. 그 주요 원인은 불안정한 고용 형태와 열악한 노동환경이라고 한다. 노인 빈곤율이 OECD 국가 중에서 최상위이며 그분들의 자살률 또한 거의 최고점에 이른다는 사실도 우리 사회는 알고 있다. 경제 선진국 순위가 세계 10위인 나라, 생명존중 사상이 투철해 여성들의 ‘자기 결정권’조차 반대했던 나라의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살 유형은 대체로 제도적 아노미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 원인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가치관에서 찾을 수 있겠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개인 또는 가족의 권리와 책임으로 돌렸다. 우리 모두는 적자생존의 원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1990년대 생들은 더 치열하게 생존 경쟁에 내몰려 있다. 복지를 민영화하는 정치는 불확실성과 절망에 익숙해지는 인구를 양산해낸다. 이 과정은 비정규직 노동과 약화된 사회복지 등으로 구조화되어 나타나며, ‘자기 책임의 윤리’와 각자 생존의 원칙을 정당화한다. 우리나라 산재 사망률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보도가 있다. 한 해 평균 10만 명 정도가 산업재해를 당하고, 2,400명 정도가 사망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던 젊은 청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피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점에서 자살과 다를 바 없다. ‘자살 또는 산재라는 이름으로 은폐된 학살’이다.
적자생존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이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무능력하고, ‘정상’에서 벗어나 있으며, 사회에 유익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위험한 자들이라는 논리. 죽어가는 사람들 스스로가 은폐된 학살의 원인이 되도록 만든다. 또한 평등과 연대를 약속한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이런 상황을 허용하는 사회구조는 악이며, 이를 방관하는 사람들은 죄인이다. 그래서 자살은 그것을 허용하는 우리 모두의 죄다.
죽어도 되는 것을 만들지 말라!
도나 해러웨이 (D. Haraway, 1944~)는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을 비판한다. 그 계명은 ‘죽기’와 ‘죽이기’의 차이를 은폐한다. 특정한 생명만을 위해 죽어도 되는 생명을 만들어내면서, 마치 어떤 생명도 죽이지 않는 것처럼 ‘죽이기’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죽어도 되는 생명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처럼, 희생제 논리로 차별당한다. 해러웨이는 인종차별, 성차별, 인간과 동물의 생명 차별을 비판하며, 차별과 혐오로 인해 죽는 생명은 ‘죽는’ 것이 아닌 ‘죽임을 당하는’ 것임을 폭로한다.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 찬사는 생명을 보호하고 생산한다는 명목으로, 도덕성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비인격적 죽음을 무한히 양산해낸다. 그래서 그는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은 ‘죽어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자는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공간이 있지만, 후자는 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도 되는 생명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나’의 생명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전체 생명’에 대한 상식을 키워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코로나가 인류에게 한배를 탄 운명 공동체임을 일깨워줬다”고 언급했다. 덧붙여,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쓴 지난 1년 동안,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우리 사회의 잔인함과 불평등 그리고 우리의 숨겨진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말했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는 무관심과 이기주의의 문화는 바로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했다는 징표’다. 생명을 뛰어넘는 발전과 성공은 악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도덕적 잣대는 혐오를 양산한다. 생명에 대한 차별은 피할 수 있는 죽음을 허용한다. 죽어도 되는 것을 만드는 사회는 우리 모두가 비인간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네가 죽어도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은 없으며,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나만 구원해줄 하느님은 없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과 발전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언급하듯, 시장의 힘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없다. 교종은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과 세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연대”를 강조한다. 죽음의 문화를 이기는 길은 너와 나의 생명이 ‘하나의 생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심현주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가톨릭사회윤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이면서 독일 사회윤리 국제네트워크(Ordo Socialis)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과 생명윤리』(공저)가 있으며, 논문으로 「가톨릭의 평화사상과 평화권 연구 -한국사회의 새로운 평화원리 구상」, 「가톨릭 사회복지의 시대적 과제 : 자선과 ‘사회적 공공성’ 운동의 연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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