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 자살 1

자살 1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정당화될 수 있는 자살은 있는가?

기독교를 비롯한 거의 대다수 종교가 자살을 금한다. 자살은 신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제거하는 짓이니 살인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이다. 불교 역시 원칙적으로는 자살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불교는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이니,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를 긍정할 리 없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무조건적으로 자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는 불교의 역사에는 소신공양이라는 형태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스님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스님들은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해친 사람들로 비난받기보다는 위대한 정신을 구현한 분들로 칭송받기 때문이다. 

사실 자살이라고 해서 다 동일한 것은 아니고, 비참한 자살이 있고 숭고한 자살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론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자살은 비참한 자살이다. 이러한 자살은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죽음으로 도피하는 자살로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할 때면 우리는 죽은 자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힌다. 더 나아가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삶은 힘든 것이라는 염세적인 기분에 빠지기도 하며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우리를 엄숙하게 만드는 숭고한 자살도 있다. 이러한 자살은 삶에 대한 절망 때문이 아니라 전태일의 분신에서 보는 것처럼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폭군 네로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네로로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었던 세네카의 예처럼, 불가피하게 자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삶에 연연해하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의연하게 죽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세네카 역시 슬픔으로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을 꾸짖고 달래면서 죽었다. 

이런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죽은 자에 대한 외경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죽을 때 나도 그렇게 의연하면서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정신은 이렇게 위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간에 대해서 새삼 긍지를 품게 된다. 삶에 대한 절망 끝에 행해진 자살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반면에, 의연하고 당당한 자살은 인간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니체는 숭고하고 기품 있는 자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더 이상 긍지를 갖고 살 수 없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명료한 의식을 갖고 기뻐하면서 적시에 이루어지는 죽음, 그리하여 떠나는 자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죽음, 또한 생전에 성취한 것과 원했던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삶에 대한 총결산이 가능한 죽음”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자살자들은 삶에 좌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최고로 승화시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그들은 삶을 누추하고 비루한 형태로 연명하는 것은 삶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는 순간에도 그동안 살아왔던 것처럼 기품을 유지하고, 이러한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최고의 아름다움과 무게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그들은 더 오래 살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고, 죽어서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신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이들의 죽음은 삶에 대한 패배도 삶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고 결실이다. 

우리가 삶에 패배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살이 삶의 완성이 아닌,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자살을 하면서 느꼈을 한없는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 그것이 안타까워서 우리는 슬퍼한다. 이러한 자살은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뿐 아니라 그가 느꼈을 절망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한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고 자살을 택할 정도로 자신들을 불신했던 죽은 자에 대한 서운함과 아울러 경우에 따라서는 분노에 사로잡히게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이 죽을 때에도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마치 대지를 둘러싼 저녁노을처럼 타올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대들의 죽음은 실패로 끝나게 되리라.”


기독교를 비롯해 자살을 무조건적으로 죄악시하는 종교들은 비참한 자살과 숭고한 자살을 구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니체는 삶에도 기품 있는 삶과 비루한 삶이 있듯이, 자살에도 기품 있고 위대한 자살과 저열하고 비겁한 자살이 있다고 본다. 그는 종교가 자살을 죄로 봄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든 연장하고 싶어 하는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조장하고 있다고 본다.

니체는 자연사(自然死)라고 불리는 것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의사나 약 혹은 갖가지 의료 시설에 의존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려는 비루함에서 비롯된 선택에 의한 ‘부(不)자연사’이며 일종의 자살이라고 본다. 이렇게 연명을 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는 자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새끼를 꼬는 자들”에 비유한다. “그들은 새끼를 길게 늘이면서 자신은 자꾸만 뒤로 물러간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은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은 너무 빨리 죽는다. ‘제때에 죽어라!’라는 가르침은 아직도 낯설게 들린다. 

제때에 죽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친다.”


불교와 숭고한 자살

앞에서 보았듯이 불교의 역사에는 소신공양이라는 형태로 니체가 말하듯이 ‘제때에 죽는’ 숭고한 자살을 하신 분들이 있다. 1963년에 베트남에서, 가톨릭을 신봉하던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불교 탄압에 항의해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로(大路)에서 자기 몸을 불살랐던 틱쾅둑(釋廣德) 스님의 죽음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사람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빨리 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면서도 틱쾅둑은 미동은커녕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불교는 항상 성성적적(惺惺寂寂)의 마음을 유지하라고 설파한다. 선불교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 즉 앉아서 죽거나 선 채로 죽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의 모습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죽는 순간에도 온전하게 깨어 있는 마음 상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자살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는 사람이 그 순간에 가졌던 마음의 상태를 중시한다. 

이렇게 죽는 순간에도 온전하게 깨어 있으면서 의연하고 기품 있게 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는 무아와 무욕을 말한다. 구름이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듯이 자신의 삶 역시 인연에 따라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여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아를 깨닫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린 사람은 죽음도 흔연히 받아들인다. 

쇼펜하우어는 흔히 이루어지는 비참한 자살은 삶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욕망을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비참한 자살은 사실은 자신이 현재 느끼는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서 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초래한 비참한 상황에 불만을 품었을 뿐, 삶 그 자체에 불만을 품으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간절히 살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만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은 자살이 수반할 신체적 고통을 무시할 정도로 극심한 것이다. 우리는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격심한 후회에 사로잡혀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거나 벽에 찧는 식으로 자해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신적 고뇌를 잊기 위해서 신체적인 고통을 자초하며 그러한 신체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시원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고뇌가 너무 클 때 우리는 신체적 고통을 초래함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잊고 싶어 한다. 

바로 이것이 육신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유다. 이러한 현상은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에게서 매우 현저히 나타난다. 이들은 신체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에 수반되는 고독감이나 허무감 혹은 무력감이나 불안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한다. 우리가 비참하게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서 동정과 슬픔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가 사실은 너무나 절실하게 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자살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무시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좌절과 고통에 시달렸으리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불교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자살을 통해 죽음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집착과 아울러 온갖 탐욕을 버려야 한다고 본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철학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서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니체와 불교』,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 『인간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실존철학의 재조명을 통하여』, 『쇼펜하우어와 원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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