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교를 보다 | 사유와 성찰

다시 불교를 보다

– 문학 속에서 ② 


이수정 

창원대학교 철학과 교수・대학원장



불교와 문학, 혹은 문학 속의 불교, 이건 불교를 이야기할 때 하나의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현학적인 ‘잘난 체’가 끼어든다면 그 의미는 반감된다. 그러나 만일 이런 이야기가 불교 본연의 ‘방편’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고명하신 대사님의 설법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이른바 ‘이야기’의 효과다. 불설 경전에 쾌목왕 이야기, 설산동자 이야기, 끼사 고따미 이야기, 상불경 이야기 등등 많은 설화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부처 본인이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엄정한 사유와 달리 이야기는 사람의 가슴에 직접 호소하는 힘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웃 일본의 소설 중에 『연환기(連環記)』라는 것이 있다. 일본 근대 문학의 대표적 개척자 중 한 사람인 고다 로한(幸田露伴)의 만년작이다. 일종의 불교 소설인 이 이야기에는 특이하게도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요시시게노 야스타네(慶滋保胤)와 오에노 사다모토(大江定基)가 그들이다. 둘 다 역사상의 실존 인물이다. 전자가 전반의 주인공, 후자가 후반의 주인공이다. 우수한 문신이었던 이 둘은 각각 출가해 야스타네는 자쿠신(寂心) 스님이 되고, 사다모토는 자쿠쇼(寂照) 스님이 된다. 이 둘은 성격도 판이하고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지만 후배 격인 사다모토가 기묘한 인연으로 먼저 출가한 자쿠신을 찾아가 그의 계도로 자쿠쇼가 됨으로써 마치 옥환이 이어지듯이 그들의 선성 내지 불성이 인연으로 연결된다. 

야스타네는 천성이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특별한 고경을 겪지는 않았지만, 마치 부처가 사문유관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해 체화하듯이 타자의 고통을 스스로의 고통으로 인식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이었는지, 야스타네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도시의 큰길 사거리에 서 있었다. (…) 때마침 또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부피가 큰 짐을 싣고 숨을 헐떡이며 큰 수레의 멍에에 묶여서 침을 질질 흘리고 다리에 힘을 주면서 끌려가던 소도 있었다. (…) 소는 있는 힘을 다해서 걷고 있다. 그런데도 소 주인은 소가 하는 일이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것을 채찍질하고 있다. 매질하는 소리는 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또 났다. (…) 야스타네는 (…) 이 사거리의 풍경을 보면서, ‘의기양양한 사람, 홀로 있는 사람, 악착같은 사람, 근심하는 사람, 오호라, (…) 세상 이치란 또한 이러한 것이었을 뿐이구나’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 늙은 소가 사력을 다하는데도 또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니, ‘아아 지쳐버린 소, 혹독한 매질,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고, 햇빛은 불타서 땅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물을 마시고 싶건만 물방울도 구할 수 없는 그 괴로움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소의 눈빛이라 했던가. 남을 꺼리는 그런 눈빛만이 알 수 없는 속마음을 내보이는데, 그걸로 대체 무엇을 호소하려는 것일까. 아아 소야, 너는 어찌하여 우둔하게도 소로 태어난 것이냐, 너는 지금 도대체 무슨 죄가 있기에 그 매질을 당하는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에 철썩하고 또 매질하는 소리가 들리니, 야스타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무아미타불 구제해주십시오, 제불보살(諸仏菩薩)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했다는 것이다. (이상경 역)


이런 인식이 그의 출가에 계기로 작용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사다모토의 경우는 ‘좀 더’ 아니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는 지방 수령으로 지내던 중 리키주(力寿)라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달콤한 이야기지만 문제는 사다모토에게 정실부인이 이미 있다는 것이다. 이 부인의 성격이 만만치가 않다. 결국 다툼이 되고 둘은 끝내 헤어진다. 그러나 자유로워졌다고 좋아하는 것도 잠깐, 그토록 사랑하는 리키주가 병이 들어 죽음을 맞는다. 사다모토는 이 여인을 쉬이 보내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그 시체와 함께 지내는데 애틋함을 견디다 못해 입을 맞추다가 그 역한 냄새에 기겁을 하게 된다. 엽기적이지만 결정적인 장면이다.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는 날은 있을 수 없다. 때는 왔고 그림자는 흘러갔다. 리키주는 나뭇잎이 흔들리다 멎어서 바람이 없어진 것을 알아채듯이 마침내 편안히 눈을 감았다. 사다모토는 자기도 같이 죽은 것처럼 되었으나 그것은 잠시 잠깐일 뿐 죽지 않은 자는 죽지 않았다. 확실히 살아남아 있었다. (…) 그저 망연자실해 있을 뿐이었다.

 (…) 사다모토는 조속히 (…) 장례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보통의 관례처럼 사회적 절차를 진척시키기에는 사다모토의 애착이 너무나 깊어서 리키주는 죽어서 확실히 나를 버렸지만 나는 리키주를 차마 버리지를 못했다. 돗자리를 바꾸고 젯상을 살피며 꽃을 공양하고 향을 태우는 등의 일은 하인들이 하는 대로 맡겨뒀으나, 승려를 불러 관에 염하는 것은 스스로 명을 내리지 않았기에 아무도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병의 성질 때문이었을까, 지금 이미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얼굴빛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사다모토는 그 옆에 낮에도 있었고 밤에도 엎드려서 안타까운 생각에 내 몸의 움직임도 내 마음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저 멍청하고 아득히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장면이다. 옛 문장에 기록되기를, 「너무 슬퍼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가 엎드려 말을 걸며 입을 빨았는데 망측한 향이 입에서 나왔기에 역한 느낌이 생겨 울고 또 울면서 장례를 치렀다」라고 씌어 있다. 살아서는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물체였다. 사다모토는 본디 사람에게 애착을 느낀 것이었다. 물체에 애착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물체가 여전히 사람 같았기에 언제까지나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무심코 자기 입을 죽은 이의 입에 가까이 대고 입맞춤을 했을 것이다. (…) ‘망측한 향이 입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그것은 정말로 누구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그야말로 진정 망측한 냄새였을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사람의 구취는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이상한 것이어서 흔히 죽은 사람 냄새라면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인데, 하물며 죽고 나서 며칠이나 지난 이의 입을 빤다는 건 아무리 애착이 갔더라도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다모토는 그것을 하였으니 과연 호걸이었다. 사랑도 어리석음도 이 정도에 다다르면 막다른 곳까지 간 것이었다. 그때 그 다 썩어가던 망자가 ‘반가워요, 사다모토 님’ 하면서 이쑤시개처럼 가늘고 차가운 손으로 남자의 목을 돌돌 감아서 매달려 들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치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일은 없었으니 사다모토는 망측한 그 향에 두려워 떨면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

그렇게 사다모토는 리키주의 장사를 치러버렸다. 장(葬)이라는 글자는 사체를 위도 풀 아래도 풀인 풀숲 속에 내다버리는 것으로 (…)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사람의 마지막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 리키주와 사다모토는 마침내 죽어서 서로 버린 것이다.

리키주에게 버림을 당하고 리키주를 버린 후의 사다모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고 뭐고, 이렇게도 없고 저렇게도 없다. 그저 거기에는 공허가 있을 뿐이었다. 사다모토는 그 공허 속에서 머리는 하늘을 이는 것도 아니고 다리는 땅을 밟는 것도 아니고 동서도 모르고 남북도 모르고 시비선악 길흉정사(是非善悪吉凶正邪) 아무것도 모르고 비틀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이상경 역)


부처가 말한 이른바 4고, 생로병사의 한 전형이다. 그 이후, 몇 장면이 더 있다. 꿩을 잡아 그 생고기를 회 떠 먹는 장면에서 사다모토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한다. 그러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이 ‘호걸’이었던 사다모토가 결국 출가를 결행해 자쿠쇼가 되는 것이다. 긴 이야기는 생략하지만, 그는 후일 송나라로 건너가 거기서 고승으로 평가받으며 살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읽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고와 집, 그리고 멸 혹은 ‘도(度)’다. 그게 불교인 것이다. 야스타네도 사다모토도 이런 과정들을 거친 후 출가해 자쿠신이 되고 자쿠쇼가 되었다는 것이 그 방향을 알려준다. 이 이야기에 고집멸도가 다 들어 있다. 불교는 하나의 명백한 방향성을 갖는 가르침이다. 고에서 멸로. 번뇌의 차안에서 고요한 피안으로. 즉 도(度: 건너기)라는 방향성이다. 그 괴로움의 강을 건너는 뗏목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그 노젓기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지혜수행)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되새겨야 한다. ‘도’라는 글자 하나에 불교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수정 일본 도쿄대(東京大)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철학전문과정에서 석사 및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프라이브루크대 연구원을 지냈고,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월간 『순수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창원대 철학과 교수·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향기의 인연』과 『하이데거-그의 생애와 사상』(공저),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 도덕경의 새 번역, 새 해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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