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 불교는? 4
한중일 불교를 말하다
정병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 한국의 불교
한국의 불교는 유구한 역사성과 찬연한 전통성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왔다. 비록 해방 이후에 서구 문물의 무분별한 도입과 서양 종교 등의 번창으로 다소 위태로웠던 점도 있었지만 무난히 위기를 극복하고 여전히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꼽히고 있다. 한국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은 소중하다. 그러나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상성의 창조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골동품적 가치를 넘어서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한국 불교는 전통 묵수적인 경향이 강했다. 여전히 교단 운영은 구호만 사부대중이지 출가자 특히 비구승이 독차지하고 있다. 또 불교 교리의 현실적 응용이나 교단의 종헌, 종법 혹은 행정 조직의 개선이나 운영 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물론 현실적 문제에 불교가 관심을 갖거나 참여한다고 해서 곧바로 불교 현대화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가 현대 사회의 각 분야에서 불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즉 불교사상이 중생 제도라는 보살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교두보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불교의 현실 참여에 응용적 아이디어를 접목하지 못했다는 점은 심각한 반성의 여지가 있다. 또 한국전쟁 이후 불거진 비구 대처 간의 갈등은 불교 발전을 가로막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그 갈등은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 수면 아래로는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가 잠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의 전망은 희망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흑백논리를 배제하는 불교의 불이적(不二的) 사상 경향, 비록 간화선 위주로 기울기는 했지만 수행 풍토의 교단 운영, 그리고 튼튼한 교세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 한국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이념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불교 현대화의 발걸음
한국 불교가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대적 요청이었고 구체적으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노도와 같은 물결이었다. 이 불교 현대화의 첫걸음은 1972년에 간행된 우리말 『불교성전』이었다. 한문투성이의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고 팔만대장경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 일을 완수한 개척자는 법정(法頂) 스님과 서경수(徐景洙) 교수 등이었다. 많은 비판이 뒤따랐지만 불교 현대화의 초석을 다진 위대한 불사였다. 곧이어 대한불교진흥원에서 발간한 『통일법요집』은 현대적 감각의 불교 의례 총람이었다. 이 작업은 목정배(睦楨培), 권기종(權奇悰), 그리고 필자 셋이 집필한 것이다. 당시의 우리 불교계에서는 산중 불교에서 도심 포교로 재일(齋日) 위주의 사찰 법회를 토요・일요 법회로 다양화하면서 법회의 성격 또한 변모해야 한다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각급 사찰이나 신행 단체에서 개설한 불교 교양 대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 불사(佛事)의 개념에 대한 인식 전환
과거의 불사는 개금(改金)하고 범종 달고, 법당 기왓장 올리는 일 등의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불교 치장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불사, 구체적으로는 불교적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동시에 사회사업을 확산하는 일이 이 시대의 불사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불교 병원, 요양 병원, 양로원, 어린이집 등의 개설이 곧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불교적 포교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의 지적처럼 미래 사회의 종교는 많은 이들의 무관심, 출가자들의 세속화 경향 때문에 상당히 어렵고 어두운 측면을 지닐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종교들의 각축 속에서 진리성에 대한 논구(論究)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어떤 종교가 더 우리 사회와 사람들에게 유용하느냐 하는 판단이 곧 미래 종교의 우열을 가리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3) 불교의 이상을 실천적으로 전개하는 일
불교의 이상을 현전화하려면 두 가지의 조건이 필수불가결하다.
첫째는 오계(五戒)의 준수다. 이를 위한 포살(布薩) 법회도 일상화되어야 한다. 불자다움의 첫걸음은 바로 스스로의 정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는 육바라밀을 비롯한 사섭(四攝), 사무량(四無量) 등의 실천적 전개다. 비록 불교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종교인들은 각 종교가 표방하는 계율 준수를 거의 외면하고 있다. 고리타분한 계율이라든가, 스님들(각 종교의 성직자들)만 지켜야 하는 일로 오해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절에서만 불자’라고 표현한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만 벗어나면 곧 바로 비불교인으로 변신하는 이 아이러니를 극복해야 한다. 불교의 목표는 성불(成佛)이다. 그러나 부처 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은 그 성불의 길을 따르는 자세다.
2. 중국의 현대 불교
현대 중국은 종교에 대한 비판 기조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마오쩌둥 정권 수립 이래 종교는 부르주아적 질서일 뿐 인민의 적이라고 간주되어왔다. 특히 문화혁명 당시에 훼손된 불교나 유교의 사원, 유적지 등은 처참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1990년 초반까지도 중국은 불자도 없었고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학자들도 없었다. 북경 사회과학원의 황심천(黃心川) 교수, 서안(西安)의 진경부(陳景富) 교수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불교적 정서는 1990년 후반부터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초대 중국 불교 회장을 지낸 조박초(趙樸初)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서열 10위 안에 들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미래의 중국 발전을 위해서는 불교 재건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조 회장은 『불교입문』이라는 상당한 수준의 불교 입문서도 출간했다. 그때부터 중국 불교는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특히 광법사(廣法寺) 등 여러 사찰에서의 불교 사회사업은 당 간부들의 편견을 없애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절에서는 1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매일 구청에 도와달라고 요청한 주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결손 가정에는 도시락을 배달하고, 지붕이 새는 집은 기와를 교체했다. 생활이 궁핍한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즉 절에 보시된 재물들과 스스로의 갹출로 이 갸륵한 사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정치권의 분위기는 서서히 불교 친화적으로 변해갔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인 줄 알았는데 불교는 중앙정부에서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의 정서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서안의 정업사(淨業寺)에서 중국인들의 템플스테이를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었다. 남녀노소 약 200명 정도가 정진하고 있었는데 염불, 사경, 참선 등을 짧게 하고 곧 걷기 명상을 진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초창기 중국 불교 모습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문화혁명 이후 해외의 중국 동포들은 고국의 사찰을 복원해달라고 많은 재물을 보시했다. 초기에는 이 해외 자본이 밑천이 되었지만 지금 중국 경제는 큰 규모로 발전했기 때문에 사찰 복원은 온전히 본토인들의 힘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조박초 회장의 뒤를 이은 2대 불교 회장은 전인(傳印) 대사였는데, 그는 비구계를 수지한 정식 승려였다. 이제는 중국 어디서나 불자를 만날 수 있고 불교적 대담을 나눌 수 있다. 북경대학 철학과에도 불교학 전공 교수가 다섯 분 있고, 섬서성 사범대학 남경대학 등에도 불교학 교수들이 많이 있다.
나는 1996년부터 5년간 ‘한중 불교 교류 연구’라는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중국에서 한 번, 한국에서 한 번 세미나를 매년 개최했는데, 나중에는 발표 신청 학자가 하도 많아서 교통정리에 애를 먹기도 했다. 지금 북경대학의 불교학 교수들은 현재 중국 내의 불교 인구가 5억 명을 넘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10억 명 내외의 불자를 기대한다고 했다. 만약 이 꿈이 현실이 된다면 현재 세계 4대 종교 가운데 교세가 꼴지인 불교가 단숨에 1위로 올라갈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불교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것을 통계적으로나 다른 방법으로 발표하기를 꺼린다. 아마 반종교 정책의 후퇴, 혹은 다른 종교의 개방 압력 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짐작한다. 현대 중국의 폭발적 불자 증가는 그들의 2000년 불교 친화적 유전 인자 때문이다. 불교는 중국의 민족 종교였기 때문에 비록 이데올로기적인 천대를 간혹 겪었더라도 그 본질을 바꿀 수는 없었다.
3. 대만, 홍콩의 불교
대만 불교의 창시는 성운대사다. 1927년 강소성(江蘇省) 출신으로 대각사에서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했다. 그는 ‘인간 불교, 인간 정토’를 내세웠고 4대 종지로서 교육, 문화, 자선, 수행을 강조했다. 그가 세운 불광산사(佛光山寺)는 세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다. 5개 대륙에 200여 분원(分院)을 세웠고, 종합대학도 5개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서래(西來, West)대학이 대표적인데 짧은 연륜에도 상당히 비중 있는 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신도는 200만 명 정도이며 현대 포교의 귀감이 될 만하다. 법당 이외에도 부처님 기념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고, 다양한 레스토랑이 구비되어 있다. 한번은 성운대사의 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법문 직전에 빠른 리듬의 법고(法鼓)를 치는 장면, 법상(法床)을 어둡게 했다가 서서히 밝히면서 스님이 허공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홍콩의 불교는 정토종과 선종으로 양분할 수 있다. 300여 곳의 사찰이 있고,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7곳, 초등학교 28곳, 중학교 18곳, 대학이 1곳이다. 홍콩 불교의 백미는 홍콩불교연합회가 운영하는 홍콩불교병원이다, 350여 병상에 7층 건물인데, 층마다 법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의 의료 수준은 세계 정상급인데, 의사들의 봉급 또한 가장 높다. 또 진료비는 엄청 싸서 초진료가 홍콩 20달러(우리돈 2000원 정도)였다. 이 병원 운영을 위해 전 홍콩 불자들이 보시하고 있다. 그 밖에 관광객이 많은 사찰들에서는 공양비를 따로 받았다. 나는 입장료인 줄로만 알았는데 번호표 뒤에 몇 번 테이블, 몇 시 몇 번 좌석이라고 쓰여 있었다. 공양 때가 되니까 스님들이 밥, 국, 찬 등이 들어 있는 큰 지게를 어깨에 지고 들어와서 정중하게 합장하고 말했다. “저희 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채식이지만 많이 드십시오.” 다시 한번 중국인들의 현실 감각이 놀랍게 느껴졌다.
4. 일본 불교의 현재 상황
일본은 동아시아의 대표적 불교 국가다. 쇼토쿠(聖德) 태자 이래 가마쿠라(鎌倉)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불교를 믿어왔고 불교는 이제 그들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 불교는 정토종, 정토진종 등으로 대변되는데 특히 교토(京都) 지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일본 불교는 도입 초기부터 생활 불교를 표방해 승려들의 결혼이 허락되었고, 복식이나 두발도 자유롭다. 스님들은 평상시에는 양복 차림이고 법회 때에만 양복 위에 황금빛 천을 가볍게 두르면 그것이 스님이라는 표식이다. 직업도 가질 것이 권장되는데, 아무래도 교수직이 대다수이지만 취향에 따라 자영업, 회사원, 심지어는 프로야구 심판 등 다양하다. 일본의 절은 단 한 번도 정치적 박해를 당한 적이 없어서 모든 절이 도심 한복판에 있다.
교토 시내는 절이 민가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한 집 건너가 절이다. 일본 불교 생활화 비법은 바로 독특한 사찰 운영 방식이다. 절에는 법당이 필수적이지만 일본 절에는 유아원, 유치원이 부설되어 있다. 젊은 부부는 출근하면서 아이들을 절에 맡기고, 퇴근할 때 데려간다. 또 일본은 불교식으로 화장하는 장례법이 보편적이다. 절 뒷마당에는 나카무라(中村) 씨 탑묘, 히라가와(平川) 씨 탑묘 하는 식으로 명패가 부착되어 있고 그곳에는 내 먼 조상에서부터 나 자신과 아들, 딸, 손주들까지 모두 한곳에 모셔지게 된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유년 시절을 절에서 보내고 죽으면 절에 갈 수밖에 없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절에 가면 이 탑에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나도 이리로 가고, 너도 또 이리로 오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일본 불교의 영속성이 진행되는 이유다.
일본 전역에 1,000여 곳의 대학이 있는데 상당수는 4년제 종합대학이지만 2년제 전문대학도 다수 있다. 특히 교토, 도쿄 등지에 불교 대학이 많은데 자기들조차 전체 불교 재산 수준을 잘 모를 정도이다. 그뿐이 아니라 국립대학에도 어디에나 불교학부가 있다. 도쿄대학의 범문학부(梵文學部), 교토대학의 불교학부 등 최고의 명문 대학에 불교학 전공이 모두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불교의 고민은 바로 그 결혼제도에 있다. 스님들이 수행자라는 인식보다는 비즈니스 인상이 깊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동남아시아와 같은 큰 스승으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한다. 자기들 스스로가 일본 불교는 학문 불교, 장의(葬儀) 불교일 뿐이라고 자조한다. 물론 정토종 이외에 독신을 지향하는 종파도 있기는 하나 그 수행 풍토가 전체 일본 불교의 주류가 아니다 보니 그에 따른 딜레마가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교의 이상인 보살도의 실천을 여법(如法)하게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제에 실패한다면 일본 불교는 형식적인 관습(慣習) 불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병조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영남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네루(Nuhru)대 교수 및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동국대 부총장, 불교학 연구회 회장, 금강대 총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불교방송(BBS)』 라디오 프로그램 <무명을 밝히고>를 오랫동안 진행했고, 지금은 경전 강의 프로그램인 <다르마 산책>을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철학사상사』, 『불교문화사론』,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불교강좌』, 『반야심경의 세계』, 『현대인의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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