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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사 전경. 절 입구 마당에 세존진신사리탑이 있다. 절 뒤로 신장처럼 서 있는 바위는 삼각산 용출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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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앞 관세음보살상 |
산사의 은덕, 삼천사
‘따듯한 그늘’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그늘, 스승의 그늘이 그렇지요. ‘산그늘’은 또 어떻습니까. 빛의 뒷면으로서 산그늘이 아니라, ‘기댈 언덕’으로서의 산그늘 말입니다. 그 ‘언덕’은 ‘은덕(恩德)’의 은유입니다. 산 많은 나라에 사는 우리는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산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사(山寺)는 신라 말 선종의 발달과 함께 ‘산그늘’에 스며들어 또 하나의 숲을 이루었습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1406년(태종 6)~1407년에 걸쳐 국가 관리 대상으로 242개의 절을 지정했을 때, 이에 속하는 대부분의 절은 ‘산중 가람’이었습니다. 이들 산사는, 산이 베푸는 은덕의 실체적 몸입니다.
삼각산(북한산 국립공원)은 우리나라의 산 가운데 가장 품이 넓습니다. 2,000만 수도권 시민들을 넉넉히 안아줍니다. 골짜기마다 들어선 100여 곳의 절—사(寺)·암(庵)—은 관세음보살의 손으로 거기 있습니다.
삼천사(三千寺)는 삼각산의 서쪽에 산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한옥마을 어름에서 1km쯤 삼천사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30분 정도면 삼천사 도량입니다.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너무 가까워서 놀라고, 절을 호위하듯 감싼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의 우람한 모습을 보면 깊은 산속에 들었다는 실감에 또 놀라게 됩니다.
삼천사는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근거 사료는 없습니다. 지금의 삼천사에서 500m 위 ‘삼천사지’에 남아 있던 대지국사(大智國師) 비가 고려 11대 왕 문종(1019~1083)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는 상당히 큰 절이었던 모양입니다. 삼천사의 과거를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습니다. “삼천사(三川寺)는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영간이 지은 대지국사비명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三千寺’가 아니라 ‘三川寺’였습니다. ‘대지국사비’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에 조각이 난 상태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1530년에 간행되었으므로 삼천사는 임진왜란 전에 폐사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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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가 산기슭에 축대를 쌓고 세운 지장보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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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 위쪽 삼천사 계곡의 단풍 |
현재의 삼천사는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마애여래입상’(보물) 곁의 암자를 1960년대에 진영 스님이 정비해 삼천사(三千寺)로 중창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삼천사는 1970년대 말에 성운 스님(현 삼천사 회주)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실질적인 중창주는 성운 스님이라고 봐야겠지요.
삼천사는 삼각산의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주는 절입니다. 삼천사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삼천사복지재단’은 7개의 어린이집, 4개의 도서관, 1개의 종합사회복지관, 10개의 노인복지관(종합복지관, 데이케어센터)을 운영합니다. 1994년에 설립된 ‘인덕원 삼천사복지재단’은 성운 스님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자비의 손입니다.
성운 스님이 삼천사 주지로 부임한 1978년은 은평구(1979년 10월 서대문구에서 분구)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서대문구의 변두리 판자촌이었지요. 서울시에서는 열두 곳의 고아원을 이곳에 몰아놓았습니다. 성운 스님은 이들의 시린 등을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사하촌 사람들의 아버지, 삼촌, 벗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덕원 삼천사복지재단’이 시작되어 오늘날 연간 시설 이용자 1,000만여 명의 커다란 우산이 되었습니다. 삼천사라는 산사의 은덕입니다.
절은 산의 손발이 되어 세상을 어루만집니다. 절은 나무를 키워 새들이 깃을 접게 하고, 숲을 이루어 세상의 우산이 됩니다. 절은, 산과 숲을 부처님의 몸으로 화현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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