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도량은 어디인가(圓覺道場何處)
지금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現今生死卽是)
- 해인사 법보전 주련
어린 시절, 어머니의 『금강경』 독경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어머니는 집 안에 불단을 마련하고 부엌에는 조왕신을 모셨다. 매일 아침밥을 지어 부처님과 조왕신께 올린 뒤에야 상을 차리셨다. 주택에 살던 시절엔 다락방에서 예불과 사경, 참선을 하셨고, 아파트로 이사한 뒤엔 드레스룸을 개조해 기도방을 만들었다. 어머니의 기도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여행을 갈 때도 방석을 챙겨 호텔 방에서 예불과 백팔배, 사경과 참선을 이어갔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친구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면 수화기 너머로 집 안에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를 함께 들어야 했다.
입시철이면 여느 보살님들처럼 팔공산 갓바위와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등 기도 도량을 찾아다녔다. 어머니 당신을 위한 기도인지 자식들을 위한 기도인지 모를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새해가 되면 통도사와 정암사 등 오대 적멸보궁을 참배하며, 그때마다 부처님의 가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느 겨울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설악산 봉정암으로 향하셨다. 곧 함박눈이 쏟아질 텐데 하루이틀 지내다가 출발하라는 백담사 스님의 만류에도 어머니는 아이젠을 착용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산에 올랐다고 했다. 깔딱고개를 넘어 어둑해질 무렵에 무사히 봉정암에 도착했고 다음 날, 어머니는 환희심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컴컴한 새벽에 일어났다. 빗자루를 들고 함박눈 쌓인 진신사리 탑으로 이어진 백팔 계단을 단숨에 올라 보궁 정상까지 눈을 쓸었다는 모험담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평생 손목에는 단주, 목에는 백팔염주, 손에는 삼천주를 돌리며 보석처럼 품고 다니셨다. 오랫동안 돌린 탓에 염주의 줄이 헐거워지면 시장을 다니며 튼튼한 실을 구입해 알알이 다시 꿰어 돌리셨다. 직접 만든 단주와 염주를 친지들과 자식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다.
팔순이 되던 해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상에 누워서도 어머니는 염주를 놓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셨다. 담당 의사는 후유 장애 없이 건강하게 회복한 어머니의 의지력을 높이 평가했다.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끝낸 후에는 손주를 데리고 전국 사찰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불연을 맺어주셨다. 기복이라고 하기에는 신실하고 정결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기도를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다. 어머니를 그토록 기도하게 만든 힘이 무엇인지, 신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기억이 흐려지고 걸음도 느려져 한 달에도 서너 번 오르던 삼각산 도선사도, 집 근처에 있는 조계사도 평소처럼 갈 수 없게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머니는 그 허전함과 고독한 시간을 좌선하는 것으로 채우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염주가 늘 함께 한다. 아마도 어머니의 기도는 끝나지 않은 듯하다.
◦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전국의 사찰이나 기도처에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접할 때면 종교를 넘어 순수한 마음이 전해질 때가 있다. 한동안 해외에서 지내며 여러 종교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이들의 일상은 낯설면서도 경건했다.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헌신하는 그들의 절대적 신앙은 때로 맹목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단순하고 견고했다. 불교는 신을 전제하지 않는 유일한 종교다. 부처님은 초월적 존재가 아닌, 스스로 깨달음을 이룬 우리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불교를 다른 종교보다 어렵게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해왔던 것처럼 대부분의 불자들이 염불과 사경, 참선과 백팔배를 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인 기도는 깨달음에 있을 것이다. 세간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지만 출세간에서는 ‘앎에서 벗어나 길 없는 길을 걷는 것’이 불교의 기도이자 가야 할 길이다.
◦ 비움으로써 드리는 기도, 마음이 쉬어지는 자리
불교의 기도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결과가 아니라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렀던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둘로 나누지 않는 불이세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힘과 믿음을 닦는 과정이다. 크고 작은 욕망을 비우고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구도심이다.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집착과 사랑하는 마음마저 비워내는 것이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 배운 나의 기도인 셈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깨달음을 향한 길 위에는 늘 같은 물음이 있었다. 그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려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반드시 만족과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기대하지 않는 삶.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며 깨달았던 진리는 무사인이 되는 일일지 모른다. 영축산에서 연꽃을 들어 마하가섭에게로 이어져 지금 우리에게로 전해지는 진리는 앎이나 생각으로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목마르게 찾고 간절히 구하던 기도는 결국 마음이 저절로 쉬어지는 깨달음의 자리, 각자가 스스로의 기도와 살림살이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깨달음을 향한 나의 기도 역시 진행형이다. 옳고 그름, 너와 나, 뭐든 둘로 나누고 가르는 분별 세계에서 벗어나 매 순간 삶 자체로 기도하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불교의 기도이자 삶의 모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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