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회광반조|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공부

나는 무엇인가,
회광반조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나는 무엇인가, 회광반조해보라


무언가를 볼 때 보자마자 그 보이는 대상에 끌려다니고,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별하면서, 보이는 대상에게 온통 관심이 쏠리게 된다. 좋아 보이는 것은 집착해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싫게 느껴지는 것은 거부하며 멀리하려고 애쓴다.

인생이란, 좋은 것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또 싫은 것은 더 많이 밀어내기 위해, 애쓰는 삶이다. 이것을 취사간택심(取捨揀擇心)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내가 좋은 것은 더 많게 하고, 싫은 것은 없애기 위해, 바깥의 대상을 좇는다.

그런데 문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전혀 색다른 시도를 해보자. ‘바깥’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바깥에 있는 것들에만 신경 쓰며 집착하고 살아오던 삶을 문득 돌이켜보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것들을 취사간택하던 삶을 돌이켜, 그렇게 바깥으로 쫓아다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으로 확인해보는 것이다. 문득, 그 바깥 대상에만 쏠려 있는 의식의 빛을 돌이켜보는 놈이 누구인지를 비추어보라. 회광반조(廻光返照).

우리는 보통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바깥 경계만 보며 살아왔다. 그래서, 보통 ‘보고 있다’, ‘듣고 있다’, ‘말하고 있다’, ‘느끼고 있다’, ‘생각하고 있다’라는 말을 쓰곤 한다. ‘보고 있음’, 즉 보는 것을 통해 ‘보고 있다’라는 이 ‘있음’이 확인된다. ‘듣고 있음’, 즉 듣는 것을 통해서도 ‘있음’이 확인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보는 작용을 통해 보고 있는 무언가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본다는 사실은 곧 보는 무언가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이런 통찰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경험이라 쉽게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조금 더 사유를 진행시켜보자.

마치 눈이 대상을 보지만, 눈이 눈은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평생토록 거울을 빌리지 않고 직접 눈을 본 적은 없다. 눈을 직접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다른 모든 것을 본다는 작용을 통해 여기에 눈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마찬가지다. 보는 것을 통해 보고 ‘있음’이 확인되고, 듣는 것을 통해 듣는 놈이 ‘있음’이 확인된다. 이 ‘있음’이라는 존재감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이렇게 ‘있을까?’

보자마자 해석하고, 듣자마자 해석하는 분별심 이전에 ‘보고 있음’, ‘듣고 있음’, ‘봄’, ‘들음’ 그 자체, 그 첫 번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들어볼 수는 없을까? 회광반조(廻光返照)해보라.

눈으로 대상을 보고 ‘컵이구나’ 하고 인식하는 것은 분별이다. 눈으로 컵을 보자마자 ‘컵’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에 먼저 확인되는 것이 이것이다. 귀로 새소리를 듣자마자 ‘새소리구나’ 하고 이름 붙이기 전에, 분별하기 전에 먼저 이 듣고 있는 근원적인 ‘있음’이 확인된다.

분별하기 이전, 생각하기 이전, 이름 붙이기 이전에 먼저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크기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하게 확인되는 이 ‘있음’은 과연 무엇일까?

당신은 지금 이렇게 있지 않은가? 보는 것을 통해 있음이 확인되고, 듣는 것을 통해서도 이렇게 나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가? ‘모르겠다’고 하는 바로 그때, 알고 모르는 내용 이전에, ‘모르겠다’를 통해 먼저 이것이 그렇게 생생하게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진정한 당신의 본래면목이다.

이 몸이나 마음이 내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진정한 성품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소리를 들으면서, 분별하기 이전에 이렇게 먼저 확인되는 이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무엇일까’ 하는 바로 이것!


그런 깨달음은 없다


수행자, 구도자들은 사실 진정한 깨달음을 원하지 않는다. 진정한 깨달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속에서 정의 내린 내 식대로의 깨달음이 경험되기를 추구한다.

깨달음은 놀랍고도 신비하며, 신비주의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그런 깨달음을 원한다. 이것은 진정 ‘깨달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의식 속의 가짜 깨달음, 즉 깨달음을 가장한 자기가 만든 어떤 상태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 상태는 전혀 깨달음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런 상태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의식 자체가 간절히 원하면 그것을 마땅히 보여주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삼매 체험, 신비 체험들은 전부 생사법일 뿐이기에,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진다. 인연생 인연멸, 그것이 모든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행로다.

그러면 또 추구하겠지.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추구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추구는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 생사법이기 때문이다.

참된 불법은 불생불멸법이다.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법이다. 이것은 내가 상상하듯이 그렇게 신비롭지도 경이롭지도 않을지 모른다. 선사 스님들은 이것을 ‘평상심’이라고 불렀고, 이것을 깨닫기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처럼 쉽다’고 했다.

내 생각 속에서 만들어놓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그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나면, 이제 비로소 이 평범한, 이미 있었고, 언제나 있을, 늘 눈앞에 있는 이 아무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드러난다고도 할 수 없다. 언제나 있었던 것이기에.

이 당연한 진실을 보고 싶은가? 내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생각, 상, 모양, 개념, 추구심을 붙잡지 말라. 그러면 너무나도 쉽게, 문득 이것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르니.  



법상 스님|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7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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