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by Ohara Donshu, Edo Period, Brooklyn Museum |
관점의 부분성과 상대성 드러내는 가르침, ‘맹인과 코끼리’ 비유
‘맹인과 코끼리’라는 인도의 유명한 우화는 관점의 부분성과 상대성을 드러내는 가르침으로 여러 불교 경전에 나타난다. 붓다 재세 시에 인도 사와티(Sāvatthi)성의 한 왕이 맹인들을 모아, 코끼리를 만져보게 했다. 한 사람에게는 코끼리의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는 귀를, 또 다른 이에게는 상아, 코, 몸통, 다리, 꼬리를 각각 만지게 했다. 왕이 물었다. “코끼리란 무엇과 같은가?” 머리를 만진 자는 “항아리 같다”고 대답했고, 귀를 만진 자는 “키질하는 광주리 같다”고 했으며, 상아를 만진 자는 “쟁기날 같다”고 다양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곧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 아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며, 그들은 결국 주먹으로 서로를 때렸다. 왕은 이 광경을 보며 조소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우다나(Udāna)』 6.4 「띳타 숫따(Titthasutta)」에 나온 이 우화는 단순히 부분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 듯하다. 붓다가 우려한 것은 이야기의 결말, 즉 맹인들이 서로를 부정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유사한 내용을 담은 『기세경』의 경면왕(鏡面王) 설화에서는 폭력적인 주먹다짐까지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맹인들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진리로 확신했고, 타자의 경험을 거짓으로 단정했다. 붓다는 이를 당시 사와티성 주변에 살던 다양한 종파의 슈라마나 수행자와 바라문들에게 비유했다. “그들은 맹목적이고 눈이 없다.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 무엇이 진리(Dhamma)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지 못한 채, 논쟁하고 다투며 입이라는 무기로 서로를 상처 입힌다.”
부분적 진리를 절대적 진리로 주장하고 강요하는 순간, 인식은 폭력이 된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맹인이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의 제한된 경험 안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코끼리는 오직 기둥과 같을 뿐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진리는 독단이 되고 대화는 단절된다.
맹인들 사이의 다툼을 보며 즐거워하는 왕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종교적·철학적 분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운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방관자이지만, 붓다가 제자들에게 이를 들려준 것은 본질적으로 경계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각 종파는 자신들의 관점에 사로잡혀 서로를 공격하고 있으며, 이는 진리 탐구가 아니라 맹목적인 당파성의 발로라는 것이다.
자이나교 전통에서 ‘맹인과 코끼리 비유’는
상대주의와 다면적 진리 향한 방법론의 출발점
인도에서 유명한 이 우화는 특히, 자이나교의 핵심 사상인 상대주의와 다면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맹인과 코끼리 비유(andhagajanyāya)”로 자주 등장한다. 자이나교의 상대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8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하리바드라(Haribhadra)도 위의 불교 우화에서처럼 당대의 사회를 수많은 상대적 관점들의 난립과 갈등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자이나교 전통에서 이 우화는 폭력의 경고가 아니라, 다면적 진리를 향한 방법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자이나교는 묻는다. 맹인들이 코끼리에 대해 각자 다른 설명을 내놓을 때, 그들 중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 답은 명백하다. 그들은 모두 옳으면서 동시에 모두 틀렸다. 각자는 자신이 만진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인식했지만, 전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불완전하다. 문제는 부분적 인식 그 자체가 아니라, 부분을 전체라고 착각하는 독단성에 있다.
하리바드라는 『육파철학집성(Ṣaḍdarśanasamuccaya)』에서 불교, 니야야학파, 상키야학파, 자이나교, 바이쉐시까학파, 미망사학파 등 6개 주요 철학 전통의 핵심 사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그는 각 학파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각 사상이 어떤 관점(naya)에서 진리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상대주의와 화해의 철학자로 대표되는 하리바드라의 방식이었다.
자이나교 상대주의의 세 가지 이론 축, ‘다면론’, ‘관점론’, ‘개연론’
자이나교의 상대주의는 단순한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의 이론적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다면론(anekāntavāda), 즉 실재가 본질적으로 다면적이라는 존재론이다. 코끼리로 비유되는 대상의 실체(dravya)는 그것을 대상답게 하는 본질(rūpa)뿐 아니라, 시공간의 다양한 조건에 따라 변형되는 무수한 양상(paryāya)을 동시에 지닌 복합체다. 코끼리는 항아리도, 광주리도, 쟁기날도, 기둥도 아니지만, 특정한 관점과 조건 아래에서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실재는 단일하지 않고(aneka) 다면적(anta)이며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주의 인식론의 전제다. 둘째는 관점론(nayavāda)이다. 각 인식 주체는 자신의 인식 능력, 위치, 조건에 따라 실재의 특정 측면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적 관점을 자이나교는 ‘나야(naya)’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나야가 거짓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맹인의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는 진술은 그가 접근한 특정 측면에서는 타당하다. 문제는 이 진술을 절대화할 때 발생한다. 자이나교는 일곱 가지 주요 관점(saptanaya)을 체계화했는데, 여기에는 실체적 관점과 양상적 관점, 그리고 더 세분화된 관점들이 포함된다. 각 관점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지만, 어떤 관점도 전체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셋째는 개연론(syādvāda), 즉 “어떤 의미에서는(syād)”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조건부 진술이다. 하리바드라는 자신의 저작 서두에서 “개연론(syādvāda)을 가르치신 마하비라께 귀의하며”라고 밝히며, 이를 자이나교의 핵심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개연론은 전통적으로 일곱 가지 조건부 진술 형식(saptabhaṅgī)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면에서, 코끼리는 존재할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할 것이라는…” 총 일곱 가지 방식으로 진술할 수 있다. 이는 상대주의적 궤변이 아니다. 각 진술은 특정한 관점과 조건을 전제한다. “어떤 의미에서”라는 표현은 절대적 주장의 폭력성을 제거하고, 대신 조건과 맥락을 명시화하는 장치다. 13세기 말리세나(Malliseṇa)는 『스야드바다만잘리(Syādvādamañjali)』에서 “모든 관점을 갖춘 ‘어떤 면에서는(syāt)’이라고 진술하지 않는다면, ‘맹인과 코끼리’ 격언처럼 피상만 붙잡는 결과가 된다”고 말한다. 개연론은 이렇듯 실재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각 관점의 한계를 자각하며, 다른 관점들과의 대화를 열어놓는다.
하리바드라의 언어적·정신적 폭력까지 포함하는 ‘철학적 아힘사’와 ‘일체지’
자이나교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원칙은 아힘사(ahiṃsā), 즉 불살생·비폭력이다. 하리바드라는 언어적·정신적 폭력까지 포함하는 ‘철학적 아힘사’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진리를 훼손하지 않으며, 타자의 관점을 존중하는 것—이것이 바로 정신적 아힘사의 완성이다. 맹인들이 “코끼리는 오직 이것이다”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며 타자의 인식을 부정하는 것 역시 언어적 정신적 폭력이 될 수 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 제한의 조건을 명시화하고(개연론), 다양한 관점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며(관점론), 실재가 다면적임을 인정한다면(다면론), 우리는 진리에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다. 맹인들이 각자 만진 부분을 서로 공유하고, 각자가 인식한 것을 조건을 명시하며 대화한다면, 그들은 함께 코끼리의 상(像)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방법론, 즉 수행(修行)으로서의 철학이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일체지(omniscience)라는 완전한 진리 인식을 정신적 아힘사의 완전한 실현이자 최종 목표로 삼는 자이나교에서 이러한 상대주의 인식의 실천을 이와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하리바드라는 눈을 떠서 코끼리의 전체 실제 모습을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체지(omniscience)’에 해당하며 깨달은 각자들이 가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해 맹인들을 진리로 이끄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완전히 눈을 뜨지 못했을지라도 각자의 어두운 시력에서 자신의 상대적 관점을 인정하고, 그 조건을 파악하며 진실에 대해서 더 다가가기 위해 대화하며 각자의 인식들을 통합해가는 노력 역시 ‘세속적 일체지’이자, 철학적 아힘사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자이나교에서 제시한 관점주의와 상대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타자와 대화하고, 부분적 관점들을 종합하며, 독단의 폭력과 무지를 넘어서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살아 있는 철학적 방법론이다. 코끼리는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갈래다. 여전히 언어적 정신적 주먹을 휘두르며 부분적 인식에 갇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서로의 인식에 귀 기울이며 함께 연대해 진짜 코끼리에 대한 전체적 이해로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인가이다.
참고문헌
양영순, 「대화의 철학자, 하리바드라의 『육파철학집성(Ṣaḍdarśanasamuccaya)』자이나 상대주의와 인도 독소그래피 전통의 효시」, 『철학과 현실』 146호, 2025
“Tittha Sutta: Sectarians (1)” (Udāna 6.4), translated from the Pali by Thanissaro Bhikkhu. Access to Insight (BCBS Edition), 2012
Paul Dundas. “Haribhadra.” in Brill’s Encyclopedia of Jainism, edited by John E. Cort etc, 2020
양영순|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인도철학 박사). 한국외국어대 인도연구소에서 HK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 고대 인도의 수행과 치유, 『사색가들의 땅 : 주별로 보는 인도사상가』, 『선(태양) 요가』 등이 있고, 「뿌즈야빠다의 『사마디딴뜨라』에 나타난 자아의 자기인식」, 「일체지(자)의 직접지각론」, 「자이나교의 일체지자 명상」 등의 논문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