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왜 ‘은자(隱者)의 벗’인지 알려주는 절집, 화성 용주사 소나무숲|치유의 숲, 사찰림을 가다

소나무가 왜
‘은자(隱者)의 벗’인지
알려주는 절집
화성 용주사 소나무숲

글/사진 은적 작가

사천왕문에서 홍살문, 삼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소나무.
조경 목적으로 심은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자연 상태로 자라온 소나무를 솜씨 좋은 정원사가 가지치기를 해 이런 모습을 띠게 되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정조 임금이 봉헌한 『부모은중경』 경판, 정조 친필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 용주사 소장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광배처럼 늘어선 소나무 숲과 절이 일체를 이룬 용주사
소나무가 곤경에 처했습니다. 여기서 곤경이란, 기후위기로 2050년이면 남한의 절반 이상 지역이 소나무가 살 수 없게 되는 딱한 형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2022년 울진, 2025년 의성에서 시작된 경북 지역의 큰 산불 이후 소나무는 대형 산불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소나무야말로 ‘피해자’인데 ‘가해자’로 뒤바뀌었으니, 인간의 언어로 항변할 길 없는 소나무로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소나무가 송진을 머금고 있어 불에 잘 타고 불길을 멀리 퍼트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산불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대부분 산불의 직접 원인은 사람의 과실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지구가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소나무를 탓합니다. 사회적 재난을 당한 피해자를 부주의한 사람으로 비난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연대라는 도덕적 부담마저 회피하려는 심리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전강 스님 사리탑. 용주사 중앙선원 조실을 지낸 전강 스님은 만공 스님의 법맥을 이은 한국 불교 근현대의 대표적 선지식이었다.
2005년 열반 30주년을 맞아 사리탑을 세웠다. 사리탑 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중앙선원’ 선방이다.

한국인의 소나무 사랑은 지극합니다. 1991년부터 2023년까지 8번의 ‘좋아하는 나무’ 조사에서 2등의 의미가 무색한 압도적 1위가 소나무였습니다. 과거 전통적 삶에서는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관으로 들어가기까지 일생을 함께했습니다. 한국인의 소나무 사랑은 순명(順命)입니다. 이런 소나무에 대한 사랑을 산불 걱정 때문에 버려야 할까요. 전혀 그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산에 소나무 숲이 우거진 데는 소나무에 대한 짙은 애정이 어느 정도 작용은 했지만 주된 요인은 아닙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소나무는 헐벗은 산에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개척 수종입니다. 이런 소나무의 생육 특성이 황폐했던 우리 산을 푸르게 물들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소나무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소나무 역시 사람을 좋아합니다. 명품 마을 숲 가운데 소나무 숲이 많고, 민가에 가까운 산의 소나무 숲이 더 아름답습니다. 과거 나무로 난방을 하던 시절 적절한 가지치기로 땔감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소나무는 사람의 (적절한) 간섭을 좋아합니다.

소나무와 사람이 어우러져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은 절집일 것입니다. 용주사도 그런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용주사는 진입로나 주위에 소나무 숲이 자리한 절과 달리 소나무 숲과 절이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불전, 시방칠등각, 대웅보전, 호성전, 지장전 뒤로는 광배처럼 소나무가 늘어서 있습니다. 특히 전강 스님(1898~1974) 사리탑 뒤의 소나무 숲에서는 탈속한 인격체의 면모마저 느껴집니다. 실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 소나무 숲속에 용주사 ‘중앙선원’이 있습니다. 전강 스님을 조실로 1968년에 중앙선원이 개원했으니 100안거 넘게 정진한 소나무 숲입니다. 이 숲을 보면 왜 소나무를 ‘은자(隱者)의 벗’이라 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용주사와 융건릉 사이의 정조효공원.
공원 옆으로 정조 임금이 용주사에서 현륭원(융릉의 옛 이름) 가던 길이 산책길로 만들어져 있고, 길가에는 『부모은중경』 구절을 새긴 간판을 세워놓았다.

융건릉의 소나무 숲길. 정조가 송충이를 씹어 먹었다는 설화를 간직한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의 외양이 용주사 소나무와 닮은꼴이다.

용주사의 실질적 창건주는 정조 임금(재위 1776~1800)입니다. 한여름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던 11세 어린아이는 왕위에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854년(신라 문성왕 16) 염거 스님이 창건했고, 고려 시대에 혜거 스님이 중창해 크게 일어섰으나 병자호란 때 불에 타 폐사가 됐던 갈양사 터에 현륭원의 능침사찰로 세운 절이 용주사입니다.

현륭원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되었고 나중에 정조의 무덤인 건릉이 융릉의 서쪽에 들어서게 되어 현재는 융건릉으로 일컬어집니다. 융건릉은 용주사에서 서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주변에 아파트와 단독주택지가 들어섰으나 용주사와 융건릉 사이로는 ‘정조효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과거 정조가 걸었던 길가에는 『부모은중경』의 구절을 새긴 간판을 세워두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융건릉의 숲길을 걸어볼 수 있는 것도 용주사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용주사의 소나무와 융건릉의 소나무는 아주 닮았습니다. 정조의 명으로 심은 소나무의 후계목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지구가 더 뜨거워져 소나무가 살기 어려워졌을 때, 절은 소나무의 마지막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용주사의 소나무 숲은 그 풍경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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