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신중신앙 |불교,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불교의 신중신앙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은해사 백흥암 신중도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인가?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1944년 아인슈타인은 “신은 우주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 with the universe)”라는 말로 양자역학을 비웃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인 통일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현재 아인슈타인을 비웃는 가장 대표적인 말로 사용된다. 우주는 필연으로만 작동하는 지적설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통일적 사고의 밑바탕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야훼)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고 작동된다는 생각. 이를 ‘유신론 안의 유일신론(하나의 절대 신을 믿음)’이라고 한다. 이를 믿는 종교는 기독교(가톨릭과 기독교)와 이슬람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불교, 유교, 도교의 동양 종교에서 신은 존재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이를 ‘유신론 안의 다신론(절대적이지 않은 많은 신을 믿음)’이라고 한다. 마치 현대 사회에서 정치나 재벌이 강력하지만, 그들에게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처럼 신은 우리보다 강하지만 제한적이라는 생각. 이게 바로 동양 종교가 생각하는 신이다.

강력한 권력과 자본은 특정한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당연히 절대나 완전은 아니다. 이런 유한적이지만 강력함이 불교, 유교, 도교에서 말해지는 신이다.

유신론
유일신: 기독교, 이슬람
다 신: 불교, 유교, 도교

불교, 유교, 도교는 신을 믿지만, 신을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현대인이 대통령을 대하는 정도의 인식이 불교, 유교, 도교에서의 신에 대한 생각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불교, 유교, 도교에서 말하는 절대의 완전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다. 이를 불교에서는 다르마(법)라고 하며, 유교에서는 인(仁)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도라 한다. 즉 불교, 유교, 도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상태에서, 신을 강자로 수용하는 정도라고 하겠다. 마치 대통령은 완성자가 아니지만, 국민의 대표권자로서 국민이 신뢰하며 존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대통령에게는 막대한 힘이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이런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동일한 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마치 한국, 중국이 모두 화폐 단위에서 원을 사용하지만, 한국 돈은 100원인 반면 중국 돈 100원(위엔)은 약 2만 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즉 두 화폐는 돈과 단위는 같지만, 내포하는 재화 가치는 완전히 다른 것과 유사하다.

참고로 진리만을 추구하며 완전성에 다가가려고 하면, 이는 과학이다. 다만 과학은 합리성으로 진리를 추구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윤리나 행복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과학은 종교와 또 다르다. 설명이 다소 복잡할 수 있으니, 간략히 도시해 드러내면 다음과 같다.

종교(행복 추구)
절대 - 신, 상대적 강함 - 천사 : 기독교, 이슬람교
절대 - 진리, 상대적 강함 - 신 : 불교, 유교, 도교

과학(합리 추구)
절대 - 진리(과학의 발달은 편리를 주지만, 이것이 반드시 윤리나 행복을 담보하지는 않음)

불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정체는?
불교는 인도 종교다. 그렇다 보니 불교의 신들 역시 불교 이전의 인도 신인 경우가 많다. 인도에는 많은 신이 있는데, 크게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해볼 수 있다.

주류는 인도의 지배계층인 아리안족과 관련해 인기 있는 신들이다. 비주류는 피지배층의 토속신 등이다. 조선의 양반으로 얘기하면, 임금을 대면하는 당상관의 고위직과 지방의 아전처럼 변변찮은 공무원의 차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불교에 들어오는 인도 신의 중심에는 벼락신인 제석천(인드라)이 있다. 제석천은 희랍신화의 제우스와 같은 신들의 왕이다. 제석천에 필적하는 신으로 범천(브라흐만)도 있다. 범천은 조물주로 수행을 좋아하는 신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신들이 있는데, 『화엄경』의 처음에 등장하는 「세주묘엄품」에는 불교와 관련된 총 39분의 신들(39위)이 등장한다. 이들은 『화엄경』과 화엄 사상을 수호하는 이들이다. 『화엄경』과 관련해서 불교를 수호하는 어벤저스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불교(교종)에서는 화엄종이 대유행하는데, 이로 인해 이후 39위는 신중단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신중단의 신들을 화엄성중(혹 옹호성중)이라 부른다. 부처님과 보살님을 보호하는 일종의 보디가드와 같은 비서실 겸 경호실의 역할을 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나 39위의 인도 신은 문화권적 차이로 인해, 개중에는 우리에게 간절하지 않은 분들도 존재한다. 또 역으로 우리는 정통적으로 신앙해왔는데, 빠지는 다수도 있게 마련이다. 해서 후대가 되면 한국적인 신들의 확장판이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우리 신 65위를 추가해 총 104위 신들이 확정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신중도를 <104위 신중도>라고 한다. 즉 맥도날드의 햄버거가 서구적인 것이지만, 한국화되는 과정에서 불고기버거가 만들어진 상태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해서 신중도가 작아서 등장 신들이 많지 않으면 <39위 신중도>라고 이해하면 되고, 등장 신들이 많다 싶으면 <104위 신중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개중에는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후대 인도 신화에 엄청난 격변이 발생한다. 제석천이 신들의 왕이지만, 장군신인 위태천(스칸다, 동진보살)에게 밀리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직급은 왕이 높지만, 김유신이나 이순신 같은 슈퍼파워의 영웅 장군이 왕을 압도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되겠다. 이 사건이 반영되어 우리나라의 신중도는 상층에 귀족 복장의 범천과 제석천이 위치하고, 아래층 중앙에는 장군 복장의 위태천이 자리하는 역삼각형 구도를 확립하게 된다.

또 인도 최고의 전투 무기인 금강저는 장군 복장의 위태천이 드는 것으로 확립되며, 제석천은 점차 금강저를 들지 않은 귀족 모습으로 정형화한다.

신이 아닌 나를 완성하는 종교
불교에서 신은 본질이 아닌 덧대진 부분이다. 부처님과 보살님이 휴대폰이라면, 신들은 폰을 보호하는 케이스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즉 불교의 핵심은 부처님과 보살님인 것이다. 또 이분들의 원칙은 진리에 대한 추구와 우리들을 자비로 구원하는 가피다.

그렇다면 신들은 불필요한 존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폰케이스는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폰이 중요한 만큼 케이스 역시 요청되는 것이 사실 아닌가?! 즉 케이스가 폰의 유지와 사용에 있어 필요한 수단인 것처럼, 신들 역시 우리의 각성과 깨침, 그리고 삶의 행복 완성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인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뽑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잘해줄 것이라는 믿음과 판단 때문이다. 불교에서 신은 대통령과 같다. 때문에 불교 역시 신에게 의지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그 어떤 대통령도 영원하지 않으며, 그 권력 역시 무한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스스로를 각성해 붓다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즉 신은 수단이고, 목적은 오직 나 자신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믿지만, 부처님과 진리만을 정조준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현 스님|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율장), 동국대 미술사학과(건축), 고려대 철학과(선불교), 동국대 역사교육학과(한국 고대사), 동국대 국어교육학과(불교 교육), 동국대 미술학과(불화), 동국대 부디스트 비즈니스학과, 중앙승가대 상담학과에서 총 여덟 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70여 권의 저서와 200여 편의 학술진흥재단 등재지 논문을 수록했다. 현재 조계종 성보보존회 성보위원, (사)인문학과 명상연구소 이사장, 월정사 교무국장,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등을 맡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헬로붓다TV’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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