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掉)를 아십니까?
정상교
금강대학교 불교인문학과 교수

수행이라는 관찰을 기반으로 한
들뜸 혹은 불안정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
‘도를 아십니까’라고 불자들에게 물어본다면 도(道)는 알지언정 도(掉)는 거의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도(掉)는 산스크리트어 auddhatya의 번역어로서 좋아하는 대상을 쫓는 사람의 마음처럼 안정되지 못한 마음의 상태로, 욕심의 일부이며 고요함을 방해하는 마음 작용이다. 불교 경전 번역의 최고봉 중 한 분인 진제 삼장(499~569)은 이를 도(掉)라고 번역했고, 현장 삼장(602~664)은 도거(掉擧)라고 번역했다. 현대어로 풀이하면 restlessness, 즉 들뜸이나 불안정을 의미한다. 불교가 이렇게 인간의 여러 마음 상태를 상세하고 치밀하게 분류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이라는 관찰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학문 체계로서 불교를 전공할 때, 혹은 사찰의 법회에서 자주 접하는 개념은 ‘나’ 또는 ‘자아’가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덩어리, 즉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색은 뼈, 근육, 혈액 등의 물질을 의미하고, 수는 감각을 최초로 받아들이는 느낌, 상은 그로 인해 떠오르는 이미지 작용, 행은 의지 작용, 그리고 식은 인식 작용이다. 결국 이 다섯 덩어리는 물질적 측면의 색과 정신적 측면의 수·상·행·식이라는 두 영역으로 분류되고 그들이 상호 의존해서 ‘나’라고 하는 가변적이고 임시적인 존재가 설정된다. 몸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적 관점을 떠나 몸과 마음의 상호 영향을 강조하는 인지과학의 최신 흐름과 매우 유사한 관점이다.
따라서 불교는 당시 인도의 다른 사상이 탐구하던 내 안에 자리하는 순수불변의 영혼이며 의식 작용을 담당하는 아트만(ātman)은 물론, 서양인들이 내 안에 있는 미니 인간의 대표로 거론하는 호문쿨루스(homunculus) ‘따위’를 정면에서 부정해버린다. 바로 무아(無我) 사상의 천명이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집착을 없애기 위해 붓다가 무아를 그토록 반복적으로 자세히 경전 곳곳에서 가르쳤다고 해도 왠지 내 안에는 정신과 의식을 담당하는 컨트롤타워가 존재할 것만 같다. 아니, 내 안의 어떤 존재를 부정한다면 우리의 인식과 의식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교는 이에 대해서도 ‘신의 뜻대로’를 외치기보다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을 전개해나간다. 우리의 앎은 눈(眼)과 그 대상인 색깔과 모양(色), 귀(耳)와 그 대상인 소리(聲), 코(鼻)와 그 대상인 냄새(香), 혀(舌)와 그 대상인 맛(味), 피부(身)와 그 대상인 감촉(觸), 생각(意)과 그 대상인 개념(法), 즉 창조주도 절대정신도 모두 감각 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어울려 순간순간 만들어졌다가 사라질 뿐이다. 다시 한번 불교는 “자아? 순수한 영혼? 절대 창조주? 자세히 보렴, 다섯 가지 영역으로 해체될 뿐이며 앎이란 우리의 감각 기관이 그려낸 순간의 그림자일 뿐이지!”라고 쐐기를 박아버린다.
이와 같이 불변하는 단일 주체로서의 ‘나’가 부정됨으로부터 자아에 대해 집착할 것이 없어지고, ‘나’가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에 얽매이지 말라는 실천적 측면의 교리 역시 도출된다. 이러한 가르침 역시 몸과 의식의 변화를 깊게 관찰한 수행에서 얻어진 결과물인데 이는 반복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확립된 현대 과학과 연결되는 지점이 된다.
이와 같이 불교는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고 불안과 공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1,500년 전 용어인 ‘도(거)를 아십니까?’라는 질문 대신 ‘들뜸(불안정)을 아십니까?’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정상교|금강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대 대학원 인도철학-불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금강대 불교인문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도쿄대학 불교학과-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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