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타사가 ‘지은’ 생태숲,
우리 모두의 정토
홍천 수타사 생태숲
글/사진 은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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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타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
조선 시대 억불의 역설, 산에 있어서 살아남았다
한국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산중 불교’를 말하기도 하는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경세와 무관한 혹은 무력한 은둔의 이미지로 ‘산중 불교’가 거론되는 경우입니다. 이때 방어적 해명으로 내놓는 것이 조선 시대의 억불정책입니다. 한국 불교의 산중화는 조선의 억불정책 때문이라는 통념이 상식처럼 굳어진 것 같은데, 사실은 반쯤 맞는 말입니다.
불교가 처음 들어왔던 삼국 시대의 초기 사찰은 평지나 궁궐 가까이에 세워졌습니다. 고구려 정릉사,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황룡사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산중 가람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때는 신라 말 선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이후 우리가 아는 대로 조선 시대에 강력한 억불정책이 시행됨으로써 산중의 절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쫓겨서 산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산에 있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한국 불교사에서 조선 시대는 고난의 시기였지만 잃어버린 시간만은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약에 크게 힘입기도 했지만, 대중과 호흡하며 자생력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산사’를 지켜낸 것입니다. 억불의 역설적 효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절은 산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통도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일곱 절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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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숲 위쪽의 은행나무숲. ‘내 나무 심기’로 만든 숲이다. 숲가에 참여자들의 이름을 적은 간판을 세워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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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타사 생태숲교육관 주차장에서 수타사로 가는 들목의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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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숲 옆 산소길. 조금 더 오르면 덕지천 물소리와 동무해 덕지천에 닿는다. 덕지천에서 출렁다리를 건너 수타계곡을 따라 수타사(생태숲)로 회귀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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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타계곡의 귕소. ‘귕’이란 통나무를 파서 만든 소 여물통(구유)을 이르는 강원도 지역 사투리다. |
사람들과 혼연할 수 있는 숲, 공작산 수타사 생태숲
통일신라 이래로 한국 불교는 산속에 절을 지었습니다. 21세기의 한국 불교는 산을 지키고 가꿉니다. 절 주위의 이른바 사찰림은 가장 건강한 숲으로 ‘국민 정원’의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속에 새로이 숲을 ‘지은’ 절도 있습니다. ‘공작산 수타사 생태숲’입니다.
2009년 수타사와 홍천군이 힘을 모아 ‘공작산 수타사 생태숲’을 만들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공 숲’입니다. 흔히 자연에 견주어 인공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또한 편견입니다. 인공도 인공 나름이겠지만, 숲을 만들어 가꾸는 일은 처음부터 자연화된 인공입니다. 작위와 동시에 하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성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수타사 생태숲은 안정적으로 자연화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인공과 자연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숲속의 나무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수타사 옆 163ha의 편평한 구릉지에 숲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들여놓은 수타사 생태숲은 생태 체험, 산림 유전자원 보호, 영서 북부지방의 자연 생태계 보전을 위한 연구 목적으로 조성했다 하는데, 번다한 설명입니다. 사람들과 혼연할 수 있는 숲 그 자체로 존재 의미는 충분합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절집이 승경을 이루듯이, 수타사 생태숲은 수타사의 고풍에 깊이를 더합니다. 동선이 절묘해, 절과 숲은 하나를 이루면서도 각기 독립적입니다.
절을 짓듯이 공들여 ‘지은’ 수타사 생태숲. 우리의 절집이 이룬,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의 정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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