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스스로 차리는 최고의 밥상|2025년 캠페인 "기도하는 삶을 살자!"

서원은
스스로 차리는
최고의 밥상

조민기
작가, 제11차 여성 불자 108인


기도를 시작한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서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했다면, 이제는 서원을 지키기 위한 기도가 필요한 것 같다. 나는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해주세요’라고 백천만 번을 빌면 어느 날 부처님이 내 앞에 밥상을 차려주시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나는 쌀 씻기, 밥 짓기, 반찬 하기, 차리기, 치우기를 배웠고 마침내 깨달았다. 기도는 내가 나를 위해 스스로 차리는 최고의 밥상이라는 것을.

◦ 참회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밥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매 순간 다짐하는 것이 바로 아이에 대해 ‘다 안다,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하지 말자’는 것이다. 거슬러 생각해보면 나도 나를 잘 모른다. ‘싫은 사람’, ‘좋은 사람’, ‘부러운 사람’은 많고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은 수십 가지나 되지만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마주한 적은 드물다.

부모가 된 후 나는 몰랐던 내 모습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어렵고 힘든 일을 아이는 술술 해내기를 바라는 욕심이나 이기심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이가 엄마 뒤로 숨거나 수줍어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환한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빛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할 줄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문득 큰 결심으로 기도하러 가서 부처님 앞에 섰던 첫날이 생각났다. 보는 사람도, 강요하는 사람도 없는데 기도가 끝날 때까지 나는 부처님께 내 소개조차 하지 못했다. 법당을 나올 때까지 소리 없는 횡설수설을 거듭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실수를 반복하며 나는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기도는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나의 참모습과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를 외면하고 회피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가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아무 영양가도 없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나를 찾아가는 것이 기도의 첫 단추다. 이 과정을 불교에서는 ‘참회’라고 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참회 없는 기도는 쌀 없는 쌀밥과도 같다. 최고의 장인이 만든 상 위에, 최고의 공예가가 만든 수저를 올리고, 최고의 그릇에 맛있는 김치를 정갈하게 담아내도 밥이 없으면 허기진 배를 채울 수가 없다

◦ 서원은 스스로 차리는 밥상이다
나는 기도의 시작이 참회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절에 갈 때면 가족들의 속옷을 챙겨 가곤 했는데, 할머니에게 불교는 장독대 위의 정화수나 동지 팥죽처럼 소원을 빌고 부정을 피하는 기복 그 자체였다. 나는 할머니의 귀에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 피아노 잘 치게 해주세요 같은 소원을 열심히 소곤거렸는데 이루어졌던 기억은 흐릿하다.

그래도 할머니가 심어둔 씨앗 덕분에 기도가 간절한, 힘든 순간이 올 때면 나도 모르게 부처님을 가장 먼저 찾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주 비장하게 결심하고 절에 갔는데 부처님을 뵙기만 하면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불교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귀동냥으로 들은 ‘부처님은 소원을 들어주신다’, ‘『금강경』만 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믿었다. 무지함은 한시라도 빨리 소원을 이루고 싶은 욕망 앞에서 뜻밖에 동기가 되었다. 부처님 마음에 드는,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 된다면 소원이 좀 더 빨리 이루어질 것 같았다. 부처님께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경전을 읽고 불교를 공부했다.

그렇게 가슴에 세속의 욕망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사심 가득한 눈으로 경전을 읽으며 나는 보배가 가득하다는 부처님의 바다에 한 걸음씩 다가갔다. 하지만 벼락치기로 후딱 공부해서 소원을 이루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단 경전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는, 유래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세상 모든 전래 동화의 뿌리가 경전에 있었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 혼내주고 싶은 사람 등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사람들과 상황들이 경전 속에 있었다.

나는 경전의 바다에서 만난 놀라운 인물들과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즐거웠다. 불교를 깊이 공부하면 저절로 겸손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허겁지겁 머릿속에 밀어 넣은 나의 얕은 지식을 사람들과 나누기에 바빴다. 나눈 만큼 채워 넣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부처님 앞에 가면 머릿속을 너울거리는 수만수천 개의 소원을 곱씹고 곱씹으며 마침내 부처님 앞에서 다짐한 나의 첫 서원을 다짐하곤 한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좋은 작가가 되겠습니다.
나아가 유용하고 유능하며 유익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바르고 행복한 작가가 되겠습니다.
나아가 세상을 바르고 행복하게 하는 글을 쓰겠습니다.


조민기|한양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가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고, 『세계일보』에 칼럼 ‘꽃미남 중독’을 연재했다. 현재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불교여성개발원 선정 제11차 여성 불자 108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조선임금잔혹사』, 『3분만에 읽는 조선왕조실록』, 『부처님의 십대제자–경전 속 꽃미남 찾기』, 『꼭꼭 묻어둔 이야기, 나의 스승 일엽스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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