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동남아시아 불교, 그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

베트남 불교

이병욱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이다. 베트남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바로 ‘젊음’에 있다고 한다. 베트남은 한국의 국토 면적보다 3배 이상 크다. 그리고 베트남은 2024년 인구 1억 명에 육박하며, 그 가운데 불교 인구가 약 70%에 이른다. 또 베트남에서는 불교의 교세가 활발히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베트남의 불교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6~14세기의 불교: 네 개의 선불교 종파
이 시기 베트남 불교의 주류는 선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 네 개의 종파로 나뉜다. 첫째, 비니다류지파(派)는 6세기 후반에 이르러 남인도 출신 비니다류지(比尼多流支, Vinitaruci, ?~594)가 베트남에 처음으로 선불교를 전한 것이다. 비니다류지는 남인도 사람으로 브라만 출신이다. 비니다류지는 574년에 중국의 장안에 도착했는데, 그때 북위 태무제의 폐불 사태를 만나서 업(鄴: 중국의 옛 도시)으로 가려고 했다. 그 도중에 그는 선종의 3조 승찬(僧璨)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다. 580년에 비니다류지는 베트남의 법운사(法雲寺)에 머물렀다. 그는 제자 법현(法賢)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입적했다. “부처의 심인(心印)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부처의 ‘심인’은 원만하기는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라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중략) 삼세의 부처도 이와 같고, 역대의 조사도 이와 같이 ‘심인’을 얻는다. 나도 이와 같이 얻었고, 그대도 이와 같이 얻었다. (중략) 그대는 이 ‘심인’을 잘 간직하라. 나는 입적할 때가 되었다.” 이 비니다류지파는 제1세 제자 법현에서 시작해서 12세 제자까지 이어졌다.

둘째, 9세기에 선불교의 무언통파(無言通派, 보곤통)가 세워졌다. 무언통(無言通,?~826)은 중국의 광주 사람으로 성은 정(鄭) 씨이다. 무언통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788)에게 가서 공부했는데, 어떤 승려와 백장의 문답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승려가 백장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의 돈오법문(頓悟法門)입니까?” 백장이 답했다. “마음이 공(空)하면, 지혜가 스스로 비출 것이다.”

그 뒤 820년에 무언통은 베트남 북령(北寜)의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무언통은 면벽수행을 하고 묵언을 했다. 무언통이 베트남에 온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감성(感誠)만이 더 예배드리고 공경했고, 마침내 감성은 무언통의 가르침의 정수를 모두 얻었다. 무언통파는 감성을 제1세 제자로 해서 제15세 제자까지 이어졌다.

셋째, 11세기에는 선불교의 초당파(草堂派)가 형성되었다. 초당(草堂)은 전쟁포로로 노복(奴僕)이 되었다가 마침내 국사(國師)가 되었다. 초당은 개국사(開國寺)에서 활동하며 승려와 재가 불자를 교화했다. 초당은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3) 계통의 선사상을 베트남에 전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입증할 문헌적 근거는 없다. 설두는 중국의 강남에서 운문종의 세력을 일으킨 인물이다. 초당의 제자로서 이조(李朝, 1009~1225) 시대의 왕인 성종(聖宗, 재위 1054~1072)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성종, 반야(般若) 선사, 우사(祐赦) 거사, 이 3명이 초당파의 1세 제자이다. 그 뒤로도 초당파의 인물로서 여러 명의 황족과 고급 관리가 포함된다. 이는 초당파의 가르침이 그만큼 황족과 고급 관리에게 영향력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13세기에는 선불교의 죽림파(竹林派)가 성립되었다. 이 죽림파는 앞에 소개한 무언통파에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죽림파는 무언통파의 선사상과 임제(臨濟)의 선사상을 결합한 것이다. 이는 베트남 불교로 변화한 임제선으로 평가받는다. 죽림파를 처음 세운 사람은 죽림 대사인데, 한편 이 죽림 대사는 진조(陳朝, 1225~1400)의 3대 왕 인종(재위 1278~1293)이기도 하다. 인종은 혜층(慧忠)에게 임제선을 공부했는데, 혜충은 무언통파의 계열이다. 인종이 영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한 뒤에 와운암(臥雲庵)에 머물렀는데, 이 인종의 영향으로 인해 죽림파의 선사상이 베트남에 널리 퍼졌다. 왜냐하면 인종은 베트남 역사에서 최대의 전란의 하나였던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친 인물이었고, 이러한 인종의 뛰어난 지도력이 불교계에서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림파는 종파로서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죽림 대사의 가르침은 법라(法螺), 현광(玄光)의 순으로 이어졌는데, 현광이 입적한 이후에 급격하게 쇠퇴했다.

15~20세기 초반의 불교
15세기에 후여(後黎, 1533~1788) 왕조가 성립되어 유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택하면서 불교의 세력은 점차로 쇠퇴했다. 그래서 불교는 대중의 종교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변모했다. 이는 불교가 융합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불교는 도교와 유교와 융합되었고, 거기에다 민간신앙에 속하는 정령신앙과 조선(祖先: 조상)신앙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사원에서는 여러 형태의 불보살상이 추가되었고, 유교와 도교의 성인(聖人)과 민간신앙의 대상에게 제사드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교의 성인으로 공자상(孔子像) 등을 모셨고, 도교의 성인으로 옥황상제 등의 여러 신(神)의 상(像)을 받들었으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신과 토지신 등을 모셨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불교 종파가 연종(蓮宗)이다. 이 연종은 인각(麟覺, 1696~1733)이 처음 열었는데, 그때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죽림파에서 분파해서 독립한 것이다. 연종은 죽림파의 선사상과 정토교의 사상이 결합한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연종은 중국 송대 백련종(白蓮宗: 염불 수행과 청정한 생활을 하는 종파)의 흐름을 이어받고, 거기에다 죽림파의 선사상, 정토종의 염불, 밀교의 의례, 베트남의 고유 민간신앙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후 베트남 불교에서 교단은 임제정종(임제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신앙 내용으로는 정토종의 염불을 중심으로 한 것은 대체로 연종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1945년 이전에는 북베트남의 불교 신도의 80%가 연종의 신도였다고 한다.

현대의 불교: 20세기 중반 이후
베트남은 1883년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1954년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남베트남에서는 1955년 지엠(Diem) 정권이 들어섰는데, 이 지엠 정권에서는 가톨릭을 보호하고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자 임제종의 종장 틱꽝득(Thich Quang Duc, 釋廣德, 1897~1963)은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비폭력 항쟁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간곡한 편지를 정부에 보내어 불교 탄압을 중지할 것을 촉구했지만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틱꽝득은 1963년 6월 11일 판딘퐁(Phan Dinh Phung) 거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몸에 기름을 붓고,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분신(焚身), 곧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했다.

이와 같은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선(禪)의 자유를 실천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틱꽝득은 남베트남의 불교 대중을 위해서 대수고(代受苦)의 자비행, 곧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중생을 대신해서 고통을 받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禪)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자유’와 ‘사회제도의 자유’를 동시에 추구한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수행을 통한 자유, 곧 몸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와 불교 탄압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동시에 추구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틱낫한(Thich Nhat Hanh, 釋一行, 1926~2022)은 1965년 미국에 가서 자신의 반전(反戰)운동의 평화안을 설명했는데, 그 뒤로는 베트남에 귀국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틱낫한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틱낫한은 참여불교를 제시한다. 이 참여불교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교의 가르침을 이용하거나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불교의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평화를 발견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평화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세계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명상을 강조한다. 여기서 명상은 사물을 깊게 보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명상은 어떻게 자신이 바뀔 수 있고,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는지 밝게 보는 것을 말한다.

1975년 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되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정권 아래에서도 베트남 불교는 활동을 이어갔다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로는 베트남 불교가 중생, 곧 인민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던 점을 거론할 수 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던 시절에 불교 사원은 베트남 독립투사의 양성소이면서 피난처가 되었다. 또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분단되었을 때도 북베트남의 승려는 자진해서 군인이 되었고, 북베트남의 불교인은 남베트남의 승려와 불교 신도와 신앙적 측면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는 나라는 분단된 상태이지만, 불교의 신앙에서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베트남 불교가 베트남 통일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또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웃 나라 캄보디아에서처럼 대량학살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도 ‘불교의 자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베트남 통일에 공로가 있는 남부와 북부의 승려와 불교 신도는 살생을 반대했고, 그래서 베트남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공민부적격자’로 판정받은 사람이 선박을 이용해서 베트남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베트남 불교의 어두운 측면도 있다. 1975년 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이 되자, 남베트남의 일부 승려는 여러 사회문제를 부각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다. 베트남에 남아 있던 저항 세력은 베트남불교연합(UBCV) 등의 반정부 단체를 만들어서 지하운동에 들어갔다. 이 베트남불교연합은 1981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반정부 단체로 규정되었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사무실은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 단체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인터넷을 통해서 베트남 사회의 인권 탄압과 종교 탄압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불교연합의 대표 틱광도(釋廣度)가 2006년에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라프토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 불교인도 적지 않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30만 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불교인으로 한국 사찰 또는 한국에 있는 베트남 사찰에서 신행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 불교계에서도 베트남 불교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것이 매우 필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병욱|한양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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