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나의 불교 이야기

헌책방에서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

김충현
전 춘천불교방송(BBS) 총괄국장


『불교학개론』 만나며 마음 속 갈망이 환한 빛으로 바뀌어
서양철학을 배운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가장 명민했던 20대 초, 그 무렵 극심한 갈증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보편적 진리를 향한 갈망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뜨겁게 흐르고 있었고, 마음 저 깊숙한 곳까지 짓누르고 있었다. 대학에서 배웠던 서양철학은(물론 내가 익힌 서양철학은 개요에 머무르던 극히 일부분이었다.) 근원에 자리하고 있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보편적 진리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어긋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졸업을 몇 달 앞둔 10월쯤, 자주 들르던 헌책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굳이 바닥에 앉아야 보이던 서가 맨 아래 칸에 동국대학교에서 펴낸 『불교학 개론』이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헐고 낡았지만 제목 다섯 글자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책을 집어 들고 몇 장이나 넘겼을까,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 있었다. 제행무상이야 정확한 뜻도 모르고 늘 되뇌던 단어였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에서 적정을 제하면 친숙한 단어였다. 갈증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또 몇 장 앞이었든가 뒤였든가 십이연기가 돋보기로 확대한 듯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한참 세월이 흘러 「법성게(法性偈)」를 통해 알게 된 가르침이었는데,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짓누르고 있던 갈망이 환한 빛으로 바뀌었다. 그 길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불교학개론』이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를 이끌었다.

번역, 방송, 집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 전하며 맺은 수많은 법연과 인연에 감사
박사 과정을 다니면서 광화문에 있던 ‘경전 읽기 모임’에서 일본어로 된 불교학 사전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또 다른 출판사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담은 『당신의 적이 당신의 스승입니다』, 『하바드의 달라이 라마』를 번역했다. 고익진 선생님의 『불교의 체계적 이해』 편집을 맡아 펴내기도 했다. 박사 과정을 휴학하고는 불교텔레비전 개국 사원으로 입사했다. 현대 한국 불교를 이끄시던 당대의 큰 스님들을 뵙고 바로 눈앞에서 법문을 듣는 과분함을 누렸다. 방송을 통해 수많은 눈 밝은 수행자들과 법연(法緣)도 맺었다. 웬만큼 알려진 전국 사찰들을 순례하며 프로그램을 만들어 불교문화 유산과 그 안에 깃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터이자 수행 도량이었다. 그야말로 부처님과 보살님들, 스님들, 불자님들의 가피였다.

2년여 불교와 관계없는 다른 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역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이야기를 담은 『쿤둔』을 번역해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반려견을 부처님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 서적 『네 발 달린 명상가』를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설악산과 인연이 되어 ‘춘천불교방송’ 개국을 앞두고 입사했다. 강원도 18개 시군에 자리한 사찰들을 다니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도청과 교육청, 시청, 군청을 출입하며 기자직도 수행했다. 강원도에서는 현대 한국 불교의 큰 스승,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 무산 대종사님 가사 자락에 머물 수 있었다. 설악산과 오대산을 오가며 춘천불교방송에서 23년을 지내다 정년퇴직했으니, 이 또한 무량한 가피가 있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다. 그사이 『자비명상』을 번역했고, 『명상여행 마음』을 써서 펴내는 등 번역을 통한 공부를 계속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2022년 아주 특별하고 아주 감사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대한불교진흥원과의 인연이다. ‘대원불교학술총서’ 가운데 여덟 번째 책,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을 번역할 수 있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과의 만남은 부처님 가르침에 발을 들인 지 40여 년 여정에서 만난 가장 중요한 인연이었다. 번역하는 내내 『니까야』, 『비나야삐따까』, 『자타카』, 『담마빠다』, 『숫타니파타』, 『테라가타』, 『테리가타』, 『우다야』, 『위숫디막가(청정도론)』, 『위방가』, 『담마상가니』, 『밀린다팡하』 등 부처님과 보살님들, 위대한 제자들이 전해주신 가르침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짠맛, 단맛, 쓴맛, 신맛을 볼 수 있었다.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금구직설을 수없이 되새김질하는 수행의 연속이었다. 일상에서는 명상과 기도로 이어졌으니 수없이 머리 조아리고 감사해도 부족할 만큼의 선연(善緣)이었다. 그렇게 펴낸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은 앞으로도 삶과 수행의 여정에서 든든하고 흔들림 없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강원 지역 일부 불교대학에서는 교재 삼아 특강도 해서 터럭만큼이라도 회향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강의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은 재단법인 여시관의 제1회 불교번역상도 안겨주었다. 크나큰 영광이었다. 한국 불교의 미래에 큰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대한불교진흥원과 맺은 인연은 ‘나의 불교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다. 정년퇴직한 지난해에는 평생을 바쳐 수행한 정학수 법사님을 만나 수천 권의 『묘법연화경』 법보시에도 동참할 수 있었다.

40여 년 전 헌책방에서 동국대학교 교양 교재 『불교학개론』으로 시작된 부처님 가르침과의 만남, 33년 일한 불교방송과의 인연, 설악산과 오대산에서 맺은 인연, 책을 쓰고 옮기면서 만난 법연들, 나를 채워준 모든 인연에 감사드린다. 터럭만큼도 되지 않겠으나, 남은 여정도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모든 생명들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정진하는 것, 그것이 나의 남은 불교 이야기가 될 것이다.


김충현 |1964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를 거쳐 박사 과정에서 수학했다. 불교텔레비전, 원음방송 등을 거쳐 춘천불교방송(BBS) 총괄국장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했다. 주요 저서에 『명상여행 마음』이 있고, 『당신의 적이 당신의 스승입니다』, 『하바드의 달라이 라마』, 『쿤둔』, 『네 발 달린 명상가』, 『자비명상』,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 등의 번역서와 「달라이 라마 그는 누구인가」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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