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이란 무엇인가
김호성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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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염불원(念佛院)’에서 징과 북 등을 치며 염불 수행을 하는 모습(출처|불교신문) |
염불의 정의
염불이란 무엇일까?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애매한 바 없지 않다. 개념 정의가 필요한 까닭이다. 필자는 사전을 찾아보는 대신, 우리 불교계의 현실을 헤아려본다.
현재 우리 종단에는 여러 곳의 총림(叢林)이 존재한다. 8대 총림이 있는데, 해인총림, 조계총림 등이다. 총림에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등이 다 있는 것으로 안다. 총림을 종합 수도 도량이라 말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모든 총림이 다 염불원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렇지 못한 총림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형식적으로 모두 갖추는 것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종단의 교육원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염불원’에서의 염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총림에 따라서 다를 수 있는데, 사십구재나 수륙재와 같은 의례의식(儀禮儀式)의 절차를 교수(敎授)하고 실습(實習)하는 것을 염불원의 교육 목표로 삼는 경우라면 다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의례의식을 염불로 인식할 때, 그 염불은 ‘의식염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역시 염불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의례의식의 내용 자체가 불보살을 생각하고 찬탄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교계에서는 ‘염불’이라고 하면 의식염불을 가리키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염불’을 의식염불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행하는 정근(精勤)염불로 인식한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등의 칭명 염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염불을 스님이나 불자들이나 생사해탈의 한 방편으로, 성불의 한 방편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실제 조선 시대 후기에는 삼문수업(三門修業)의 불교였다. 여기서 ‘삼문’은 선문(禪門), 원돈문(圓頓門), 염불문(念佛門)을 말하는 것이었다. 선은 간화선이고, 원돈문은 화엄이었으며, 염불문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이었다. 그 ‘원돈문’을 굳이 화엄에만 국한하지 말고 모든 ‘교문(敎門)’으로 확대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삼문수업의 전통은 앞으로 되살려나가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는 총림의 염불원을 제대로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종단의 교육원에서는 8대 총림 중 아직 염불원이 존재하지 않는 총림에는 염불원의 설치를 정책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이미 존재하는 총림의 경우에 그 내실이 어떤지를 살펴서, 의식염불 일변도의 ‘의례 교육원’ 같은 방식의 운영을 지양해야 한다. 물론 의례염불의 교육도 필요할 수 있다. 그 부분을 고려하더라도, 그 전반적인 대종(大宗)은 칭명염불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염불원에 염불문의 교학에 정통한 스님을 종장(宗匠)으로 모시고 젊은 스님들이 모였으면 좋겠다.
염불의 방법
칭명염불은 불보살의 명호를 소리 내서 일컫는 것을 뜻한다. 매우 단순하게 보이는 행법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고도 방대한 교학 체계가 있다. 관음, 지장, 아미타, 미륵, 약사 등의 불보살에 대한 신앙 체계를 폭넓게 연구하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아미타불 정토신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넓고도 깊은 교학 체계를 형성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신앙은 그 정토신앙에 준해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염불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초기 불교의 부처님 당시까지 소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의 염불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런 중에 필자는 ‘칭명염불’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불보살의 명호(名號, 이름)를 소리 내서 부르는 것이 곧 칭명염불이다.
물론 염불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칭명염불은 비교적 후대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의 염불들보다 칭명염불이 가장 광범위하게 대중화되었음을 염불의 역사는 보여준다. 그 이유가 없지는 않다. 가장 행하기 쉬웠기 때문이리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보더라도,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말이 염불의 뜻일 터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인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수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 자비로운 분, 지혜로운 분 등등. 그러한 덕성(德性)을 생각하는 것이 다 염불이다. 그 다양한 덕성들을 헤아리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제일 먼저 부처님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부처님의 명호를 떠올리지 않고, 그 덕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 없다. 수없이 많은 덕성들이 다 이름 하나로 수렴된다. 그래서 그 이름을 실마리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보살의 이름을 일컫는다. 반복적으로 외게 된다. 이때, 주의할 것이 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혹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를 때, 그 칭명은 응답(應答)이라는 점이다. 선창(先唱)이 아니라 후창(後唱)이다. 후창은 선창에 대한 응답일 터인데, 우리의 칭명염불을 부르는 선창이 이미 존재했다는 점,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염불의 방법은 바로 여기에 그 핵심이 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우리의 칭명염불 이전에, 아미타불이 우리의 이름을 먼저 부른다. 먼저 불렀다. 어떻게 불렀을까? 바로 나의 이름을 염불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이라 이름 부르기 전에 이미 우리는 ‘아미타불’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다. 안다는 사실은 그 이름을 먼저 들었다는 이야기다. 문명(聞名)이다. 실제로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나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칭명 이전에 그 이름을 먼저 들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칭명 이전에 ‘아미타불’이라는 이름을 듣는 행위가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이름을 먼저 들은 것 속에서 “아미타불이 나의 이름을 불러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 부르는 나의 칭명은 ‘나의’ 칭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나의 칭명에 주체일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결혼식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자. 축하하기 위해 결혼식을 간다. 결혼식에 간 사람은 분명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청한 사람이 나로 하여금 결혼식에 가게/오게 한 것은 아닐까? 그 행위의 주체는, 오히려 내가 아니라 초청자가 아닐까? 가는 자 이전에 초청자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칭명염불은 사실은 ‘불보살’이 주체가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필자는 ‘불타주의’라고 말한다. 불타가 행위의 주체라는 점을 그렇게 표현해본 것이다.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칭명염불의 주체가 ‘나’라고 한다면, 그 염불은 ‘중생주의’의 염불이 되고 만다. 중생이 염불의 주체라는 입장이다.
‘내가 아미타불을 염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금강경』에서 버리라 말하는 아상(我相) 아니겠는가. ‘내가 염불한다’, 혹은 ‘내가 명호를 부른다’라는 그 ‘나’를 내려놓을 때, 그래서 무아(無我)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부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관무량수경』에서 “염불하는 중생은 섭취(攝取)해 버리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염불이다.
김호성|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붓쿄(佛敎) 대학, 고치(高知) 대학, 류코쿠(龍谷) 대학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으면서『일본불교사공부방』 발행 · 편집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대승 경전과 선(禪)』, 『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 『관세음보살이여 관세음보살이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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