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 그 원작 파헤치기 — 인간은 왜 '돌아가는 길'을 택했는가

정여울 작가의 이럴 땐 이 책을! / 『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김기영 옮김 , 민음사 刊

이런 독서 붐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개봉을 기념하며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이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영화에 비춰 원작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호기심은 언제나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준다.『숫타니파타』에는 거의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파란만장한 구절들이 이어진다.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리고 후렴처럼 반복되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 온갖 유혹과 함정을 뚫고 나가는 오디세우스의 험난하고도 처절한 여정을 연상시킨다.

영화 『The Odyssey』 공식 포스터. 사진|Universal Pictures.

오디세우스라는 새로운 인간형

이 작품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가리키는 말은 ‘폴리트로포스’, 즉 굽이치며 돌아오는 자라는 뜻이다. 한번에 직선으로 빠르게 돌아오는 자가 아니라, 많이 돌아다닌 자, 많이 휘어진 자, 많이 굽이친 자. 트로이가 함락된 뒤 세상의 온갖 길을 떠돌아야 했던 그 사람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노래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오뒷세이아』다.

트로이 전쟁의 서사시『일리아스』가 분노로 시작한다면 — 아킬레우스의 분노, 짧고 곧고 타오르는 직선의 감정 — 『오뒷세이아』는 처음부터 곡선이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향해 똑바로 걸어 들어갔다. 명예와 함께 스러지는 것, 그것이 그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다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하고, 정체를 숨기고, 눈먼 거인 앞에서 스스로를 "아무도 아니다"라고 부른다. 그는 명예롭게 죽기보다 비겁하게라도 살아서 돌아가기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 한복판에 이런 인물을 세워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복적이다. 오디세우스의 영웅됨은 창끝이 아니라 혀끝에, 힘이 아니라 임기응변에 있다. 그는 문명이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종류의 지성 —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형태를 바꾸는 지성 — 을 서사시의 주인공 자리에 밀어 넣은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다.

바다는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다. 포도줏빛 바다라는 그 유명한 형용구는 단순한 색채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낮과 밤의 경계도, 취기와 각성의 경계도 흐려버리는 어떤 무의식의 표면이다. 오디세우스가 건너야 하는 것은 지리적 거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로토파고이족의 섬에서 그의 부하들은 망각의 열매를 먹고 고향을 잊는다 — 이것은 향수(鄕愁)의 반대편에 있는 유혹, 즉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대한 유혹이다. 키르케의 섬에서 인간은 돼지로 변한다 — 짐승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욕망에 완전히 투항했을 때 인간에게 남는 형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잔혹한 은유다. 세이렌의 노래는 아름답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것은 추함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돛대에 묶인 채로 그 노래를 듣는다 — 위험을 완전히 피하지도, 완전히 굴복하지도 않는 이 자세, 결박된 채로 아름다운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다는 이 기묘한 중용이야말로 그의 지혜의 본질에 가장 가깝다. 그는 다 들으면서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왜 불멸을 거부하는가

그리고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가 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불멸을 준다고 했다. 늙지 않는 몸, 끝나지 않는 시간, 아름다운 요정과 함께하는 영원한 지금. 그런데 그는 그것을 거절한다. 밤마다 그는 요정의 동굴에서 잠들면서도 낮이면 바닷가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파도를 바라본다. 죽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 페넬로페가 이제는 예전의 그녀가 아닐 것이라는 것 — 이 모든 유한함을 그는 불멸보다 더 간절히 소망한다. 서양 서사시의 뿌리에 이미 이런 선택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불멸이 아니라 필멸을 선택하는 용기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유한함이야말로 우리 눈앞에 있는 존재를 더 간절하게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을. 오디세우스가 뗏목을 만들어 칼립소의 섬을 떠나는 순간, 이 시는 조용히 인간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완성한다. 인간이란, 영원을 거부하고 굳이 유한한 세계로 돌아가는 존재다.

저승으로의 여행 — 네퀴이아(νέκυια) — 은 이 시의 가장 어두운 지하실이다. 오디세우스는 죽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길을 묻기 위해 산 채로 죽음의 문턱까지 걸어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너무도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다. 그녀는 아둘 오디세우스가 전쟁터로 떠난 뒤 아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에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 번이나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하지만, 그녀는 그림자처럼 그의 팔 사이로 빠져나간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서로를 만질 수 없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닫는다. 아무리 닿고 싶어도, 아무리 포옹하고 싶어도, 결코 닿지도 포옹하지도 못하는 것이 죽음임을. 그리고 그는 아킬레우스의 혼백을 만난다. 거기서 영웅 아킬레우스는 뜻밖의 고백을 한다. 저승에서 떵떵거리며 왕으로 군림하느니 차라리 살아서 남의 밭을 가는 머슴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킬레우스. 오직 찬란한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 영웅이, 죽음 너머에서는 그 선택을 후회하는 듯한 이 대목은 『일리아스』 전체에 대한 『오뒷세이아』의 조용하고도 잔인한 반박이다. 전쟁 영웅의 눈부신 영광보다 평범한 인간일지라도 ‘오늘 살아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짜고 푸는 것도 하나의 싸움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짜 심장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페넬로페일지도 모른다. 스무 해 가까이 그녀는 백 명이 넘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밤이면 낮에 짠 천을 몰래 풀어버리는 방식으로 시간을 버틴다. 짜고 푸는 이 행위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오디세우스의 지략에 정확히 대응하는, 그녀만의 굽이침이다. 남편이 바다에서 괴물과 유혹과 싸우는 동안, 그녀는 궁전 안에서 시간이라는 가장 다루기 힘든 적과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단번에 믿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를 키워준 늙은 유모는 거지꼴로 변한 오디세우스를, 그의 흉터를 보고 단박에 알아보지만, 아내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시녀에게 명하여 그들의 침대를 방 밖으로 옮기라고 말한다. 그 침대는 살아 있는 올리브 나무를 그루터기째 깎아 만든 것이어서, 결코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오직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만이 안다. 오디세우스가 이 불가능한 명령에 격분하는 순간, 페넬로페는 비로소 그를 알아본다. 그를 시험하는 마지막 관문은 흉터도 활도 아니라, 오직 둘만이 공유하는 기억이었다. 이 부부는 서로를 사랑으로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로 알아본다. 그것이 어쩌면 사랑보다 깊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오디세우스는 곧바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거지로 변장한 채 자신의 궁전 문턱을 넘는다. 자신의 집에서 이방인이 되어야만 그 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이 역설. 늙은 개 아르고스만이, 스무 해를 주인을 기다리며 똥더미 위에서 늙어간 그 개만이 그를 즉시 알아보고는, 반가움에 꼬리조차 흔들 기력이 없어 그저 눈을 감고 숨을 거둔다. 이 장면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답다. 아내조차도 거지꼴로 변한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디세우스가 키우던 늙은 개만은 주인을 기억했다. 인간의 언어와 지혜와 위장술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짐승의 순수한 기억만이 정확했다.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는 종종 곁가지로 취급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시 전체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없이 자란 소년이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여정, 그것은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또 다른 종류의 항해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법을 배우고, 아들은 집을 떠나는 법을 배운다. 두 사람이 마침내 돼지치기의 오두막에서 재회할 때, 아테나는 잠시 오디세우스의 거지꼴 변장을 풀어 아들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돌아간다는 것은 달라진 서로를 다시 선택하는 일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도착한 이타카는 그가 떠났던 그 옛날의 이타카가 아니고, 그를 맞이하는 이는 그가 기억하는 스무 살의 신부가 아니며, 그 자신도 트로이로 떠났던 그 젊은 왕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흉터로, 나무 침대로, 오직 둘만이 아는 사실로. 어쩌면 귀환이라는 것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변해버린 두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시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삼천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 노래가 여전히 사람을 붙드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폴리트로포스, 굽이치며 돌아오는 자다. 살아남기 위해 얼굴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때로는 스스로를 아무도 아니라고 불러야 했던 적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곳이 우리가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그 어긋남을 끌어안고도 다시 노를 젓는 것, 그것이 이 시가 삼천 년 동안 조금도 낡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건네는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위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흔들리며, 굽이치며, 구불구불 돌아서, 결국 내가 돌아갈 자리를 찾는 것이다.

 

정여울
작가.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데미안 프로젝트』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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