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의 맑은 마음
- 염담(恬淡)과 일기(一氣)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마음은 왜 이렇게 다른가?
남은 늘 내 마음을 몰라준다. 왜 그럴까? 내 마음에는 너밖에 없는데, 너는 나 말고도 또 있다. 이때 기준은 ‘남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기준인 한, 나는 늘 서운하다. 그러나 남은 그런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셔놓고 남 탓이다. 내 마음과 남의 마음을 그런대로 엇비슷하게 맞출 수는 없을까?
누구의 마음에는 드는데, 누구의 마음에는 안 든다. 내 마음과 남의 마음을 엇비슷하게 맞출 수는 없을까? 서로 자지러지게 좋아하진 않더라도 서로 그럭저럭 차분하게 좋아할 수는 없을까? 사람이 오더라도 달이 차듯, 사람이 가더라도 달이 기울 듯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그런 마음가짐이 오히려 인간관계를 잘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까?
내 마음조차 왔다 갔다 한다. 아침에는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 저녁에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조울증(躁鬱症)이 아니더라도 아침에는 울다가 저녁에는 웃는 경우도 많다. 기쁨과 슬픔은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무리 기뻐할 땐 기뻐하고 슬퍼할 땐 슬퍼한다고 하지만, 이런 급격한 변화와 낙차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차라리 맹맹하면 안 될까?
나를 좋아하길 보물을 만난 듯하는 사람은 내가 보물이 아닌 것을 알고는 실망하고 떠나간다. 그럴 때면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랬어’라는 생각도 든다. 단교한 동업자끼리도 그렇고, 이혼한 부부 사이도 그렇다.
어린 시절 친구는 나를 늘 별 볼 일 없이 여긴다. 울고불고, 먹고 싸고, 모든 것을 같이했던 벗이 신비롭거나 위대하게 보일 리 없다. 그래서 보면 보고 안 보면 안 보지만, 어릴 때 벗은 늘 좋다. 기다림도 없지만 헤어짐도 없다.
어떤 마음가짐이 좋을까? 어떤 관계가 좋을까? 아무리 희망은 욕망에서 나오고 사랑은 욕정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런 것에 휘둘림 없이 잔잔한 물줄기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떤가?
선현들은 우리에게 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라고 했을까? 작은 것에 너무 좋아하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을 담대하고 의연하게 바라보면서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세계에는 너무도 많은 희비와 애락이 넘쳐나지 않는가.
잘 알 듯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성어가 있다.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이다. 도가 계열로 분류되는 『회남자(淮南子)』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변방에 사니 야생과도 가깝고, 국경과도 가까웠다. 기르던 말이 도망가서 이웃이 걱정해주니 늙은이는 그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어, 말은 야생의 짝을 데려와서 살림 밑천이 되었다. 이웃이 말이 늘어나 좋겠다고 하자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어, 늙은이의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된다. 이웃이 다리를 절게 되어 안타깝다고 하자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마침내 국경에서 전쟁이 터졌지만 징병에서 빠져 아들은 목숨을 건진다.
도가다운 이야기다. 화복뿐만 아니라 시비, 미추, 희비, 마침내 선악조차 떠나고자 하는 도가다. 무엇이라도 한쪽으로 쏠려서는 안 된다. 세계는 늘 상대성이 함께 간다. 기쁨과 슬픔이 나란히 달려가는 세계다. 제3의 눈을 갖고 세상을 봐야 한다. 그런 상대성에 휩쓸리면 안 된다. 둘로 나뉘지 않은 하나의 세계를 봐야 한다.
따라서 노자는 마음이 달거나 쓰지 않은 맹물 같아야 하며, 넘실거리고 출렁거리지 않고 고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자는 그 마음의 주체인 사람의 몸조차 어떤 하나의 힘이 그저 모였다 흩어지는 것으로 바라본다.
덤덤하게 마음을 풀어놓기
노자는 ‘빈 마음(虛心)’, ‘다투지 않는 마음(不爭心)’, ‘바보 같은 마음(愚人心)’, ‘함께하는 마음(天下心)’, ‘살아 있는 마음(生氣心)’을 목표로 삼는다. 바보와 같은 마음을 지니라는 것이 눈에 띄는데, 왜냐, 바보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다. 배운 사람이야말로 자꾸 나눈다. 한 덩어리의 세상을 자꾸 쪼개서 못난 놈과 잘난 놈을 나누고 네 편과 내 편을 나눈다.
그럼 빈 마음은 어떤 마음가짐일까? 노자는 이를 ‘염(恬)’이라 한다. 고요하다는 뜻이다. 또는 ‘담(淡)’이라 한다. 맹물이란 뜻이다. 노자는 제31장에서 ‘염담(恬淡)’이라고 정식화한다.
염담은 우리말로 하면 덤덤한 것이다. 모든 일을 덤덤히 여겨라. 무덤덤하라. 영광도 덤덤하게 여기고, 치욕도 덤덤하게 여겨라. 영욕에 매달리지 말라. 영욕은 본디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덤덤한 마음이 최상이라고 여기는 노자를 이어받은 장자는 독특한 일기(一氣)론을 제창한다. 우주는 하나의 기로 이루어져 있어 그것이 뭉치면 삶이고 흩어지면 죽음이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우리가 기쁨과 슬픔에 매달려 있을 까닭은 없다. 그래서 장자는 그의 부인이 죽었을 때 처음에는 울다가 나중에는 부인이 천지의 한 기로 되돌아간 것을 깨닫고는 마침내 장단을 맞추며 노래 부른다(「至樂」).
장자는 ‘염담무위(恬淡無爲, 「胠篋」)’이라든가 ‘허정염담(虛靜恬淡, 「天道」)’ 등의 표현으로 노자의 무위를 다른 개념과 연용해서 쓴다. 다시 말해, 염담을 하는 방법이 무위이고, 염담의 내용이 허정인 셈이다. 허정하면 염담해지고, 염담하면 무위한다. 비슷하게 ‘평이염담(平易恬淡, 「繕性」)’, ‘허무염담(虛無恬淡, 「繕性」)’이란 말도 쓴다. 그리하여 장자는 ‘덤덤한 마음을 기르기(養恬, 「繕性」)’를 주장한다.
도대체 덤덤한 마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 위의 새옹지마의 일화처럼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기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의 기복에 상처를 입는다.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라. 그러나 그것이 우울한 상태는 아니다. 오히려 잔잔해서 즐거운 상태다. 염 자에는 즐거울 유(愉) 자가 붙는다. ‘염유의 편안함(恬愉之安, 「盜跖」)’처럼 말이다. 따라서 염담은 ‘느긋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 물질적 풍족과는 다른 정신의 여유로움이다. 이 말, 참으로 번역하기 어렵다.
느긋함의 위대함
『문자(文子)』라는 책에서는 노자의 말이라면서, ‘대장부는 염담하여 근심이 없다’고 한다.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땅을 수레로 삼고 사시를 말로 삼고 음양을 마부로 삼으니 길이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고 아무리 멀어도 힘들지 않고 무궁한 땅으로 내달릴 수 있단다. 느긋함의 위대함이다. 촉급한 자는 세상에서 바쁘지만, 느긋한 자는 천지의 한 힘 속에서 논다. 장자는 이를 ‘소요(逍遙)’라고 불렀다. ‘만물을 탄 채로 내 마음 놀리기(乘物以遊心)’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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