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연결하라
-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 보여도, 우리를 연결하는 것들
불교의 ‘시절 인연’,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집』, 그리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정여울 작가
다시 헤어짐으로써 비로소 끝맺은 아름다운 시절 인연
불교 용어 중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단어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시절 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요즘 특히 자주 들린다. 모든 일들이 제때 맞춰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인연이 성립된다는 뜻이니, ‘어쩌면 그 사람은 그토록 절묘하게 때맞춰 나타나 주었을까’라는 고마운 인연에 더욱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데 시절 인연은 우정이나 사랑, 가족처럼 뭔가 정확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관계만은 아니다. 우정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관계. 그러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인연. 그 사람이 아주 멀리 있어도 그 사람이 나와 어딘가 깊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셀린 송 지음, 황석희·조은정·임지윤 옮김, 을유문화사 刊, 2024 |
◦ 슬프고 어리둥절한 헤어짐이 아닌 성숙하고 아름다운 헤어짐,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집』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집』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해성과 나영은 초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다. 두 사람은 풋풋한 첫사랑 같은 느낌을 공유했지만, 나영이 캐나다로 이민을 갈 때 서로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멋진 작별 인사가 될지, 아직 알지 못했기에. 그리고 우리가 영영 헤어진다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기에. 어른이 된 해성은 아직도 나영을 잊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두 사람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화상 통화로 연락하게 된다. 이제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약하며 성공적인 미국인의 삶을 살고 있는 나영은 해성과의 화상 통화가 매번 설레지만, 두 사람이 지금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영의 삶은 뉴욕에, 해성의 삶은 한국에 있기에.
몇 년이 지난 뒤, 해성은 그저 단 한 번이라도 나영을 만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뉴욕에 왔다. 나영은 이제 노라가 되어 아서와 결혼했지만, 해성을 반가운 마음으로 만난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서로의 모습에 놀란다. 맙소사, 그 꼬마 해성이가 나를 보러 이 머나먼 뉴욕까지 찾아왔구나. 노라는 온몸으로 전류처럼 흘러넘치는 반가움에 해성을 꼭 껴안지만, 그 반가움 저 너머의 온갖 고민과 슬픔 또한 함께 출렁인다. 두 사람은 드디어 서로의 마음 깊은 곳 진심을 깨닫는다. 해성은 나영을 사랑했던 이유를 이렇게 묘사한다. “근데 이번에 와서 확인한 사실은, 넌 너기 때문에, 떠나가야 했어. 그리고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니가 너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넌 누구냐면, 떠나는 사람인 거야.” 노라는 이렇게 응수한다. “너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너의 앞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냐. 이십 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해성은 고백한다. “알아. 그리고 난 그때 겨우 열두 살이었지만, 그 애를 사랑했었어.”
노라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 전생에 뭔가 있었어. 아니면 왜 우리가 지금 여기 있겠어? 근데, 우린 이번 생에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될 인연은 아닌 거야. 왜냐면, 우리가 거의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같은 도시에 있는데…….” 해성은 마치 노라의 마음을 대신 완성해주듯 이렇게 말한다. “여기 니 신랑이랑 함께 앉아 있지. 이번 생에서는, 아서랑 너랑 그런 인연인 거지. 팔천 겁의 인연이 모인 사람인 거야. 아서에게 너는, 곁에 남는 사람인 거야.” 안타깝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 속에서 이 순간은 ‘지난 모든 시간과의 영원한 작별’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작별은 꼬마 시절 그 슬프고 어리둥절한 헤어짐이 아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의 그물망으로 엮여 있었는지, 두 사람이 간직한 추억이 얼마나 진실한 감정들로 빛나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뒤의 더욱 성숙하고 아름다운 헤어짐이기에. 그들은 꼭 그 자리에서 헤어져야 했고, 그들은 꼭 그 시간에 거기서 만나야 했으며, 그들은 꼭 그때 그 장소에서 다시 헤어짐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운 시절 인연을 끝맺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刊, 2023년 |
◦ 낯선 사람의 조건 없는 환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또 하나의 시절 인연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볼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부모보다 더 애틋하게 한 아이를 구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클레어 키건을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명작이다. 빌 펄롱은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문득 자신의 삶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만 국한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언제나 쉼 없이 다음 일, 다음 일만을 계속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어떨까, 펄롱은 이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펄롱은 자신이 일을 나가던 수녀원에서 어린 소녀들에게 고된 빨래 일을 시키고, 온갖 청소와 험한 일들을 강요하며 소녀들을 감금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겁에 질린 소녀 세라를 발견하고, 펄롱은 이 소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딸들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 소녀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강제 노동의 상황에 내맡겨져 있었던 것이다.
펄롱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이 마을의 어떤 사람도 수녀원의 수녀들에게는 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역사회가 존경해 마지않는 성직자들이 바로 이런 아동학대를 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수녀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펄롱의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줬다.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는 결코 구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구한 것은 바로 낯선 사람, 미시즈 윌슨의 친절이었던 것이다. 펄롱은 바로 그런 낯선 사람의 조건 없는 환대를 이 가여운 아이 세라에게 베풀 수 있는 용감한 어른이 된 것이다.
펄롱은 고통받고 있는 소녀 세라를 구출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커다란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몸이 한없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 자신의 가장 멋진 부분이 세상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수녀원에서 학대당하고, 착취당하고, 차별받던 아이 세라를 구하는 것. 그 아이에게 마침내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것.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 채 천대받는 아이를 ‘세라’라고 불러주는 것. 이름을 불러주고, 그 아이를 안아줌으로써, 그 아이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으로 환대하는 것. 그것이 좋은 어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의무였던 것이다. 희망은 이렇게 다가온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 그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아름다운 시절 인연이 아닐까.
정여울|작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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