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서 서원으로 |불교와 욕망

욕망에서 서원으로

성태용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욕망인가?
“욕망을 버려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님들의 설법 속에서나, 절에 가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불자들에게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들리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을 버리고 나면 무슨 힘으로 살아가나요?”

일반적, 평균적인 사람에게는 욕망이 바로 삶을 끌고 나가는 힘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이야말로 사회 자체를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근본 전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없던 욕망까지도 자꾸 만들어내면서 사람을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의 몇 배를 소모하게 함으로써 자연을 망가뜨리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점이지만, 아무튼 욕망이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욕망을 버리면 어찌 될까? 모든 것은 다 꿈과 같은 것이니 거기에 매달리지 말자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은 이 사회 속에서 혼자 행복하고 만족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전혀 남과 비교하지도 않고,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성인 수준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 수준의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범상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욕망을 벗어나야 한다는 고상한 가르침은 되뇌면서,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현실의 삶은 그냥 욕망 추구에 몰두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절에 가서 그것을 반성하거나, 고상한 정신적 유희로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척하는 이중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너무 결과만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우리가 힘이 부족해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욕망을 벗어난 청정한 삶의 이상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무엇인가를 다시 물을 수 있다. 어쨌든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무 목표도 없이 그저 살아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벗어난 존재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 ‘서원’과 ‘욕망’은 양립할 수 없나?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욕망을 벗어난 존재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 그것은 바로 ‘서원’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 ‘도를 구하는 마음’ 등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러한 말들을 모으면 ‘서원’이란 말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궁극이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이다. 그런데 여기가 정말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욕망과 서원은 아예 뿌리가 다른 것인가? 욕망은 힘써 없애고 서원을 세워야 하는 그런 구조인가? 그렇다면 욕망과 서원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요, 생사와 열반이,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하는 대승의 가르침으로 보아 이렇게 욕망과 서원을 양립할 수 없는 대척적인 관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인간이라는 존재가 타고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욕망에다 ‘나쁜 것[惡]’이라는 분별을 덧씌우는 것 또한 불교적일 수 없다. 불교가 근본적으로 가진 가장 중요한 관점은 바로 ‘있는 그대로’가 아닐까? 욕망은 욕망일 뿐이다. 그것에 선악의 관념을 덧씌우는 것은 정말 새로운 번뇌의 근원을 만드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욕망이나 서원에 선악의 구별을 덧씌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혹 불교 속에 욕망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너무도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을 구하기 위한 방편설로 보는 것이 옳다. 지나치게 몸에 탐착하는 중생의 모습을 구하기 위해 제시된 몸이 더러운 것이라고 관조하는 수행법, 즉 부정관(不淨觀) 때문에 몇십 명이나 되는 출가자들이 염세적인 관점에 빠져 자살을 했던 불교의 흑역사가 있다. 욕망에의 지나친 끌림을 막기 위한 부정적 묘사 또한 이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욕망을 버리라는 가르침에 얽매여 현실적인 삶의 동력은 잃고 냉소적인 태도로 무기력하게 사는 불자, 불교적인 가르침은 고상한 장식품으로 삼고 현실은 철저히 욕망 중심으로 사는 이중적인 불자의 모습들은 바로 그러한 예가 아닐까?

욕망과 서원이 ‘둘이 아님’을 가르치는 『유마경』
중생이 결정적으로 중생이기만 하고, 부처는 중생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면? 번뇌는 참으로 번뇌이기만 하고 깨달음은 완전히 그것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깨달을 길이 없다.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틈새가 있다면 영원히 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스레 말장난으로 ‘둘이 아님[不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과 서원도 그런 ‘둘이 아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둘이 아님’을 가르치는 가장 유명한 경전인 『유마경』에서 우리는 이원론적인 대립을 극복하는 큰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유마경』에는 모든 삿되고 거짓되고 악한 것들의 씨앗이 되는 성품이 바로 부처의 씨앗이 되는 성품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벗어던져버린 자는 오히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가르침을 들은 마하가섭은 통탄한다. 자기들처럼 번뇌를 완전히 떠나보내는 식으로 수행을 한 아라한들은 부처를 이루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수 없다고! 부처의 종자를 썩혀버렸다고! 정말 아라한은 성불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을 이원적으로 고정하는 관점에 서면 절대로 진정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아픈 말로 잘못된 불교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방편임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 현실의 잘못된 불교의 모습도 이러한 아픈 반성을 통해 바로 드러내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전환에 정말로 올바른 방향성을 주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감동적인 표현이 『유마경』에 있다.

“연꽃은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야 피어나는 것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표현에 깔려 있는 분별을 통쾌하게 깨뜨리는 말이다. 연꽃은 고귀하고 진흙은 더럽다는 분별에 매달리는 것이 바로 소승적인 관점이요, 그 분별을 깨뜨리는 것이 대승적인 관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 올바르게 서는 것이 우리 불교를 올바르게 세우는 길이다.

욕망에서 서원으로 변화되어가도록
집착과 잘못된 방향성에서 벗어나 자비 실천의 깨달음으로 나가야
욕망은 더러운 것이 아니다. 바로 깨달음으로 나가는 힘이 거기에 뿌리를 둔다. 그 힘이 없어진다면 어디서 다른 힘을 구할 것인가? 저열하고 더럽다는 눈으로 보는 것부터 바꾸어가야 한다. 그 속에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되어야 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 갈무리되어 있다. ‘나’라는 집착을 벗어던지지 못해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얽어매려는 잘못된 방향성이 문제일 뿐이다. 지혜의 눈이 뜨이면 뜨일수록, 자비 실천으로 깨달음이 열리면 열릴수록 그것은 점차 서원이라는 모습으로 변화되어간다. 서원이라는 말이 본디 무슨 뜻인가? 올바른 목표에 대한 큰 바람[願]을 다짐함이 아닌가? ‘바람’은 욕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중심으로 잘못된 방향성을 가지고 작동되는 바람이냐, 나와 너와 나아가 모든 중생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올바르고도 건강한 방향성을 가진 바람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욕망이 이끌어가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그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 우리 중생의 모습…. 그러한 모습을 더럽다 하지 말자. 그래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는 이들의 소중한 마음들이 그 속에 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답게 피어날 연꽃의 종자들이 아닐까? 나 자신도 이쁘게 돌아보자. 아집에만 머물지 않고, 차츰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떠, 나에 매몰되지 않는 보다 큰 바람을 가지는 모습에 거룩한 서원의 완성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단지 욕망과 서원을 둘로 보지 않는 관점의 차이가 무에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하면 안 된다.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의 마음으로 뛰어드는 큰 서원의 물꼬가 여기서 트인다. 자기 사랑에서 온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나가는 흐름이 여기서 시작된다. 부정적인 눈과 긍정적인 눈의 차이가 처음에는 작은 차이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실천의 분기점이 된다. 욕망과 서원을 둘로 보지 않는 올바른 눈과 그에 바탕한 참된 실천! 그러한 중요한 분기점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성태용|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건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월간 『불교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한국철학회 회장,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우리는선우 대표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주역과 21세기』, 『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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