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가을
그림/글 이호신 화가
가을은 결실과 함께 비움의 계절
아침 산책길에 낙엽이 쌓여만 간다. 낙엽의 형태와 빛깔이 모두 다름은 저마다의 시간과 무늬를 지니고 있어서이다.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성숙의 과정과 인간적 함의가 들어 있다.
시각적으로는 여러 단풍이 어울려 있을 때 더욱 실감 나고 아름답다. 자세히 살펴보면 잎맥마다 지나온 계절의 실핏줄과 바람이 생사(生死)의 노래를 들려준다.
텃밭도 거의 비었다. 폭염에 여러 작물이 아쉬웠지만 고추 농사는 만족할 만하다. 잔디 마당에 널린 태양초의 붉음이 정열적이다. 고추는 모든 형태가 다르나 쓰임은 하나이니 문득 ‘잘되고 못된 것을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 떠오른다. 지난날의 허물을 스스로 돌아보며.
돌담장에 기댄 감나무 두 그루는 옛사람이 심어놓은 것이다. 늦가을이면 익은 감이 주홍 등처럼 창공에 떠 있는 풍정을 만끽한다. 이 고마운 선물은 곶감으로 만들어 친지와 나누는 일이 한 해를 보내는 일이 되고 있다.
까치밥을 위해 손이 닿지 않는 감은 따지 않으니 물까치 떼가 날아든다. 낮달이 쪽빛 하늘에 웃음 짓고 가지 사이로 새와 감의 만남을 바라보며 서성이니 아득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새삼스레 확인한다. 가을은 결실과 함께 비움의 계절이라는 것을!
모든 초목이 성장을 잠시 멈추고 잎을 떨구어 텅 빈 충만의 세계를 열어주는 섭리이다. 한편 잡초 억제용 비닐을 걷어낸 텃밭의 흙이 모처럼 반갑다. 지난 것들은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어 새날을 기약할 것이므로.
저녁 노을빛을 따라 둑에 오르니 마른 옥수숫대가 바람에 나부낀다. 원경의 지리산이 출렁거리며 저무는 하루를 장엄하고 있다. 지상의 마지막 얼굴로 남은 이파리의 형해(形骸)를 바라보는 시간이 허허롭다. 나는 이 장면을 화폭에 담고 싶어졌다. 한때의 존재가 메마른 잎을 휘날리며 가슴으로 들어온다. 지난 시간 대지의 숨결 속에 뿌리내리며 호흡했던 생명이 아니었던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이 아닌 또 다른 날의 기약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사람이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뒷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서 가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이호신|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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