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양, 언어를 제거하되, 제거하지 말라|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공부

이름, 모양, 언어를
제거하되, 제거하지 말라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이름표를 떼고 바라보라
머릿속의 생각으로 현재의 경험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취사간택하지만 않는다면, 지금 이 경험은 그저 지금 이러할 뿐이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일에 관해 생각으로 좋은 것, 나쁜 것이라고, 옳고 그른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경험은 무엇일까? 어떤 언어, 말, 이름으로도 지금 이 경험을 규정짓지 않는다면,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에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면, 지금 이 삶의 경험에 대해 한 말도 붙일 수 없다. 그저 지금 이러한 경험이 일어날 뿐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것에 대해 판단하고 해석함으로써,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 그러나 이름표를 떼고, 분별을 빼버리면, 그저 지금 이러할 뿐, 어떤 것도 알 것은 없다. 오직 모를 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경험은 무엇일까? 오직 모를 뿐이다. 안다는 것은 의식, 분별의식, 육식(六識)일 뿐이다. 그저 모를 뿐으로 경험해보라.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분별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의 현재를 그저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저절로 경험되고 있지 않은가? 모를 뿐으로 경험할 때, 지금 이대로의 진실이 드러난다.

언어 이전의 생생한 진짜 삶
이름, 언어는 내가 실제 경험한 내용을 축소시킨다. 경험이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 생생한 알맹이는 사라진다. ‘사랑해’라는 말은 말일 뿐, 내 가슴의 생생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말의 뜻을 따라가느라, 말이 아닌 진짜 현실을 놓치지 말라.

언어라는 것은 하나의 상(相, 이미지)이다. 우리 안에 특정한 상으로 저장되었다가 그 말이 필요할 때 튀어나오는 것이다. 저마다 사람들은 자기 경험에 따라 같은 말에 서로 다른 의미를 투영한다. 똑같은 말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일 수 없는 이유다. 언어라는 것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다.

‘사랑해’라는 말은 그저 단순한 말일뿐, 내 가슴의 생생한 진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사랑해’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생생하게 사랑하라. ‘용서해’라는 말보다, 그저 용서했음을 보여주라. ‘포옹’이라는 말보다 뜨겁게 안아주라.

말의 뜻을 따라가게 되면 그 말 이면에 있는 진짜 의미를 잃기 쉽다. 말이 필요할 때는 방편으로 말을 쓰되, 언어 그 이전의 생생한 진짜 삶에 접속하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과 마주하라.

이름과 모양을 따라가지 않으면
‘이름’과 ‘모양’을 따라가지 않으면, 지금 여기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 즉 유형무형의 모든 모양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것을 안다고 인식한다. 인식하는 것이 곧 분별하는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를 인식해 둘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별한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크다’, ‘작다’라고 이름 붙이고, 크다고 분별해 알고, 작다고 분별해 안다. 그런데 이런 습관적인 ‘이름 붙이기’와 ‘모양 따라가기’, 그리고 그로 인한 인식과 분별, 앎의 습관, 대상을 이름 붙이는 습관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 왜 이렇게 하라는 것일까? 본래 우리의 천진한 본래 성품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난 어린아이는 그 어떤 대상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구분하며 차별하지 않았다. 아는 것이 없었고, 그저 모를 뿐이었다. 바로 그 첫 번째 자리, 우리가 나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보자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을 때, 모양을 따라가 차별심,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어떨까? 그저 있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 보일 뿐이다. 그저 지금 이대로일 뿐이다. 그저 이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이름도 모양도 분별도 해석도 인식도 앎도 붙지 않는다. 그저 이러할 뿐.

이를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했다. ‘상(모양)이 있는바 모든 것은 본래 허망하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해서 보지 않을 때, 상을 상으로 보지 않을 때, 즉견여래, 곧장 여래를 보게 된다. 이름과 모양에 따라가지 않을 때, 지금 눈앞에, 목전에 늘 여래가 현전하고 진리가 드러나 있다. 이 말을 머리로 해석해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체험적으로 경험해보라.

지금 목전에 무엇이 있는가? 대답하려고 머리를 굴리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고, ‘이런 모양은 이런 이름’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그저 보라.

정견(正見)! 중도(中道)! 목전의 이것! 뜰 앞의 잣나무! 볼펜! 할!

이것이 무엇인가?

형색과 언어가 큰 도이니 제거하지 말라
그렇다면 언어, 이름, 모양, 형색, 소리, 분별을 다 없애버려야 하는 것일까? 무분별심이라는 반야 지혜는 분별이 없는 마음이지만, 그것은 분별 형색 모양 없는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색이 있는 거기에 즉해서 공이 있다.

지공화상은 『대승찬』에서 ‘참된 도의 본체를 깨닫고자 한다면, 빛과 소리, 언어를 없애지 말라. 언어가 곧 큰 도이니 번뇌를 없앨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도 있듯, 번뇌 망상과 분별이 있는 바로 거기에 도가 있다.

무엇이 도인가? 뜰 앞의 잣나무! 무엇이 깨달음입니까? 스마트폰!


법상 스님|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하여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6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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