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맹자의 착한 마음 - 군자의 마음, 심(心)에서 성(性)으로|동양의 마음

공자와 맹자의 착한 마음
- 군자의 마음, 심(心)에서 성(性)으로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문제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강아지처럼 냄새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냄새로 소통하는 방법도 있다. 강아지는 사람보다 후각 능력이 최대10만 배나 뛰어나다니 우리가 언어를 쓰면서 상실한 지각 능력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병원에서는 암 진단에 개의 후각이 쓰이고 그 정확도가 90%를 넘어간다니 놀랍다. 동네 어귀에 집 떠난 딸이 돌아올 때 개가 알아차리는 것은 내가 믿기로는 발소리가 아니라 냄새다. 당연히 바람이 거꾸로 불면 개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바닷물 속에서도 미끼를 찾아오는 물고기도 후각이 대단히 발달한 놈들임에 틀림없다. 물속의 후각이라는 것을 기관의 구조상 사람은 상상할 수 없어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판단하고, 어떻게 행위할까? 철학자들은 늘 이게 궁금했다. 사람도 한눈에 반해서 사랑을 이루기도 하니, 시각적 동물이기도 하다. 손을 잡아서 교감하기도 하고 어떤 냄새가 그립기도 하니, 촉각적이거나 후각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차림’에서 ‘어떻게 할까’를 거쳐 ‘이렇게 하자’에까지 이르는 인지의 주체를 담당하는 신체의 중심 기관이 있으리라는 설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너 왜 그래?’라고 할 때, 대체로 우리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대꾸한다. ‘내 마음이 그래’, 아니면 ‘나도 몰라’다. 거지에게 돈 만 원을 주니 옆에 있던 사람이 묻는다. ‘너 왜 그래?’ ‘그렇게 내 마음이 가네’, 아니면 ‘나도 모르겠어’다. 정확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어’라는 말은 ‘내 마음이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므로 사실상 대답은 오직 하나, ‘내 마음이 시켜서’다. 마음은 이렇게 우리의 인지, 판단, 행위의 명확한 주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나의 행위가 있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내 느낌에는, 내 생각에는, 나의 도덕적 판단으로는’이라고 덧붙일 뿐이다. 재밌는 것은 우리말에 ‘내 느낌’이나 ‘내 생각’이 거의 동가적 수준이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감정적인 판단이나 이지적인 판단을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의 마음(心)은 서양의 마음(mind)과는 달리 가슴에 있다.

가슴이 놀라서 귀신으로부터 도망갔고, 가슴이 뛰어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부푼 가슴은 희망이고, 뛰는 가슴은 의지다. 가슴에 맺힌 것은 원한이나 복수이며, 가슴에 새긴 것은 기억이나 신념이다. 나는 벅찬 가슴에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고, 가슴이 뜨끔거려 우리의 주변을 살피기로 했으며, 때로 사람들 가슴에 못 박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핀다.

이렇게 우리말은 이미 ‘마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사람은 마음 때문에 움직이며 그 마음은 다름 아닌 가슴이다. 그리고 그 가슴은 가슴살도 아니고, 염통이나 폐도 아니다.

공자의 심과 맹자의 성
공자는 이런 마음에 관심이 있었을까? 공자는 이런 심적 주체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의 마음은 ‘마음먹은(는) 것’으로 요즘 식으로는 결심(決心) 정도의 뜻이다. ‘일흔이 되니 마음먹은 대로 해도 되더라’(「위정」), ‘안회는 마음먹으니 삼 개월을 가더라’(「옹야」), ‘(공자는 하릴없이) 마음먹은 것이 있구나’(「헌문」), ‘종일 밥만 먹고 마음먹은 바가 없다’(「양화」) 정도다.

공자에게 ‘마음먹기’가 특별하게 강조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새롭게 마음먹기보다 이미 주어진 예법의 실천이 중요했다. 다시 말하면 마음보다 그것을 담는 그릇이 더 중요했다. 공자에게 마음을 담는 그릇이 바로 예(禮)였다. 그래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안연」)고 세게 말한다. 예에 따라 행하면 될 뿐이다. 마음먹기라는 주체적 판단보다는 성현이 만들어놓은 예제의 객관적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이때 마음먹기란 단순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예에 따라 먹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랑이라는 덕목을 인(仁)이라고 부르면서 그 방법으로 ‘나를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안연」: 克己復禮)을 제시한다. 나는 예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마음먹을 수도 있고, 예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이때 예와 대립하는 방향을 접고 예와 합치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마음먹어야 한다.

공자가 군자에게 ‘넓게 배워 예로 모으라(「안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라는 원칙을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많이 배우면 뭐 하나, 많이 알면 뭐 하나, 예로 모아지지 않으면 쓸데없는 것을.

실제로도 『논어』에는 심 자가 6번, 예 자가 43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성(性) 자는? 단 2번 나온다. 그것도 공자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다’(「공야장」)는 구절과, ‘본성은 비슷하지만 습관은 멀어진다’(「양화」)는 구절에 그친다. 타고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를 얼마나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느냐가 관건이라는 맥락이다.

이 예라는 표준을 공자가 말하는 인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 제자가 순자(荀子)였다. 이렇게 공자에게는 인과 예라는 두 길이 있었다.

또 다른 공자의 위대한 제자인 맹자는 사랑의 길을 간다. 그에게도 공자가 말하는 예가 중요했음에도 그는 예의 근원, 예가 보편적일 수 있는 바탕,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요순이 예를 만들었다면 요순의 본성이 선했기 때문에 그것을 만든 것이다. 본성이 악한 데 어떻게 선한 예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맹자는 ‘성선을 이를 때 말끝마다 요순이다’(「등문공」상). 착한 본성이 거룩하게 발현한 이들이 성현이고, 바로 그들이 만든 것이 우리의 문명사회를 유지하는 예법이다.

맹자는 그래서 당시 통용하는 ‘심’이라는 말보다는 ‘성’이라는 말을 선택한다. 심은 도망도 가고 마구 움직이고 하니, 그놈을 잡아(「고자」상: 求其放心) 꼼짝 말게(「공손추」상: 不動心) 해야 하는 것으로 선한 것이라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심을 선한 것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후대에 심이 선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역입한 결과다-그것은 동시대의 전적인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심의 뜻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심은 이리로도 저리로도 튄다. 선심만이 아니라 악심도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이런 선악이 혼재한 심에서 순선한 성을 간추려냄으로써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까닭을 드러낸다. 우리에게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심)이 있어 그것이 사랑을 낳는다.

우물에 빠질까 아이를 잡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라.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에게는 욕심도 있지만 그런 선심이 있어 도덕을 이룬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 별건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 그 마음을 추려낸 것이 우리의 성, 성선의 성이다.

따라서 맹자의 사단(불쌍하다, 부끄럽다, 뒤로 서자, 옳고 그르다는 마음)은 분명히 가슴의 일로 감정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느낀 마음이다. 옳고 그른 마음조차 ‘어, 이건 아닌데, 이게 옳은데’라고 느끼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마음을 다하는 것은 자기의 본성(감정)을 아는 것’이고, ‘마음을 지키려면 본성(가슴)을 기르라’고 선언한다(「진심」상).

머리에서 가슴으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다는 이야기를 한다. 머리를 굴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은 분명 가슴의 일이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누구는 느끼고 누구는 못 느낀다.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지나친다. 왜 그런가? 머리에서만 놀기 때문이다. 감정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느끼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남을 위해 울거나 손을 내밀거나 주먹을 쥐지 못한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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