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승수군’이라는 ‘사람의 숲’ 여수 흥국사|치유의 숲, 사찰림을 가다

영취산의 계곡이 빚은
‘의승수군’이라는 ‘사람의 숲’
여수 흥국사

글/사진 은적 작가

흥국사 무지개다리(보물). 현존하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이 다리 아래 계곡은 오래전부터 여수 사람들이 여름을 나는, 이곳 너머의 저곳, 피안이었다.
부도전과 산기슭의 소나무 숲. 부도전 가에 도래솔처럼 소나무를 가꾼 것이 아닌가 싶다.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할 것’이란 이름에 걸맞게
수행과 구세의 일치 실천한 도량
여수 사람들은 흥국사 계곡에 발을 담그고 여름을 건넙니다. 흥국사 어귀의 무지개다리(보물 제563호, 홍교(虹橋))가 드리운 국보급 그늘은 심술기마저 보이는 햇살도 토닥토닥 잠재웁니다.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물장구 소리에 계곡이 들썩입니다. 그 물은 조금 더 흘러내려 중흥저수지로 모입니다. 이 저수지는 과거 여수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중흥동의 땅을 적셔 곡식을 살찌웠습니다. 중흥저수지의 물빛이 고운 까닭은 한여름 더위를 삭힌 여수 사람들의 다정한 마음이 깃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중흥저수지 일대는 ‘흥국사 산림공원’으로 물가의 나무 그늘을 따라 걷기도, 돗자리 깔고 누워 낮잠 자기도 좋습니다.

흥국사 계곡을 건너는 무지개다리는 절집의 진정한 존재 의미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물인데도 1639년(조선 인조 17)에 세운 최초의 역할을 그대로 해내며 어떤 제약도 없이 누구에게나 발길을 허용합니다. 물론 다리 아래로는 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긴 하지만, 우는 아이에게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어르는 것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박물관 안에서나 볼 수 있는 유리창에 갇힌 신라 금관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불교 문화재의 대부분은 생생히 제 역할을 합니다. 절 숲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연에 스며들게 합니다. 절 숲에서 사람들은 구태여 자연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집의 나무와 숲에서는 자연과 인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가장 인간다운 것이 가장 자연적일 수도 있습니다. 고승의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다는 고목에 얽힌 전설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너그럽게 휘어 도는 숲길이 열립니다. 길가 부도 옆 산기슭은 활엽수가 대부분인 산에서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도에 어울리는 숲을 가꾸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 덕분일 것입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으로 이끄는 숲길의 시작 부분에는 졸참나무가 서 있습니다. 가로수로는 이채롭습니다. 아마도 본디 있던 참나무 숲 사이로 길을 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숲길이 다하는 계곡 앞에는 늙은 벚나무가 품이 벌게 그늘을 안고 있습니다. 돌다리를 건너면 천왕문이 열리고, 선 굵은 모습의 봉황루가 이제 절의 품속에 안겼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흥국사 들머리 숲길. 길은 천왕문 앞에서 계곡을 건넌다.
천왕문 앞 계곡 가에는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넉넉히 그늘을 드리운다. 예전 여수 사람들은 초파일이면 이 그늘에 덕석을 깔고 만든 좌판의 국수를 사 먹기도 했다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흥국사의 초파일은 잔치 마당이었고 장마당이었다. 그렇게 흥국사는 여수 사람들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다.
원통전 옆 원동천계곡을 따라 오르는 숲길. 꽃무릇이 무더기로 피어 초가을을 장엄하는 곳이다.

흥국사 도량의 형국은 영취산 서쪽 기슭으로 흘러내리는 두 계곡이 마치 엄마가 아기를 안은 듯한 모습입니다. 계곡 가에는 물을 좋아하는 느티나무가 계곡의 기운을 절 마당으로 이어줍니다. 북쪽을 감싸는 원동천계곡은 영취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성마루로 이어집니다. 남쪽 계곡은 구시골에서 흘러내립니다. 구시골은 산속인데도 벼농사를 지었을 정도로 물이 좋습니다. 흥국사 계곡은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승전에 버팀목이 되어준 의승수군이 상주하는 주진사(駐鎭寺)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은 부드러움으로 강고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흥국사는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스님이 1196년(고려 명조 26)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할 것’이라는 뜻을 담아 세운 절입니다. 스님은 미래를 내다봤던 모양입니다. 임진왜란 때 세상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자 일어선 의승수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니까요. 흥국사의 의승수군은 조선 후기까지 많게는 600여 명의 스님이 수행과 구세의 일치를 실천한 도량이었습니다. 정녕 ‘사람의 숲’이었습니다. 그 숲은 이제 흥국사 계곡과 숲으로 이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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