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은 우리의 인격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나|정견(正見), 왜 중요한가?

정견은 우리의 인격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나

전현수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정견은 인격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정견에 의한 인격 변화를 언급하기에 앞서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인격의 정의부터 살펴보면 정견이 인격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의학에 의하면 사람은 주위 환경과 자신에 대해 반응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으며, 이 특성은 잘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특성들의 합을 인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격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특성, 행동, 태도 및 습관의 조합을 말한다. 또는 개인의 독특한 역량, 가치관, 행동 양식, 사고방식 등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달리 표현하면 한 개인이 자신이나 세상을 보고 있는 방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위 환경과 자신에 대해 반응하는 특성들을 인격이라고 했는데 사실 반응은 그것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가치관, 행동 등은 우리가 대상이 되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로 온 것이다. 희망이 없고 허무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잘 보면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다. 희망이 있고 살 만하다고 느끼려면 보는 것에서 희망과 살 만한 것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 정신을 가지고 순간순간 대상을 접한다. 그때 그 대상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순간의 마음이 달라지고 우리에게 오는 영향이 달라진다. 대상을 지혜롭게 보면 유익한 마음이 일어나고 좋은 영향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대상을 어리석게 보면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고 안 좋은 영향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여기서 어떻게 보느냐가 선행한다. 그것에 따라 결과가 뒤따른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는 대로 세상은 꼭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똑같은 대상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의 말이 같았던 이유
정견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바르게 보는 것은 뭘 어떻게 보는 것인가. 이것은 종교나 이념이나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불교적인 것에 국한하고자 한다. 특히 초기 불교에 국한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는 정신과 의사이면서 초기 불교 공부와 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 배경에서 정견을 말하는 것이 잘못이 없을 것 같다. 정견은 그야말로 바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잘 관찰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누구든지 동일한 조건에서 자기 것을 덧붙이지 않고 관찰하면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의 말이 같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자기가 본 것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면 다른 과학자들도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것이 관찰되어야 한다.
정견은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팔정도의 정견을 말할 수 있다. 필정도의 정견의 경우도 사성제를 알고 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연기법, 즉 인과의 법칙이나 업설을 정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넓게 말하면 어떤 경우이든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다 정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서 그에 맞게 하는 것도 정견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 남과 충돌 없이 살아가는 것도 정견이라고 할 수 있다. 꼭 불교가 아니더라고 바로 보고 있는 것은 정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바르게 보는 것은 다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보는 것이 바뀌면 바뀐 만큼 달라진다
정견이 아닌 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 정견은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생각으로 한 것은 정견이 아닐 가능성이 커진다. 보는 것에 대해 뚜렷하고 확실하지 않을 때는 모른다고 하면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견은 정확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 않고 잘못 본 것을 근거로 해서 뭘 하면 문제가 생긴다. 정신과 의사인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세상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잘못 본 것에 근거해 뭘 하니 자기가 의도한 대로 일어나지 않아 괴롭고 그 괴로움을 잘못 처리하다 보니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경우다. 이때 치료자로서 내가 할 일은 환자들이 더 이상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을 멈추고 정확히 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정견이 되면 정견이 아니고 잘못 봤을 때 오는 결과에 변화가 온다. 예를 들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고 절망감이 들었는데 어떤 일을 계기로 세상을 보는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대로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뭐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게 되면 화나 절망감이 없어진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한다. 그때 세상의 이치에 맞게 자기를 고친다면 그 일어난 일이 자기를 좋게 만들어서 고맙다고 생각할 것이다. 보는 것이 바뀌면 바뀐 만큼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른 것에도 적용된다. 자기가 하는 일에도 적용이 되고 남을 보는 것 그리고 자기가 대하는 어떤 것에도 적용이 된다.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정견의 세 가지 수준
그런데 정견에도 정도가 있다. 세 가지 수준이 있다. 정견의 내용이 그것을 생각할 때만 생각이 나고 평소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다. 무심코 뭘 하면 정견을 놓쳐버리고 머릿속에 정견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어 정견대로 못 사는 경우다. 두 번째 수준은 필요할 때는 정견이 머릿속에 떠올라 정견대로 살 수 있는 수준이다. 세 번째 수준은 항상 정견이 자기 속에 있어 발휘되는 수준이다. 이때는 언제나 정견대로 살아갈 수 있다. 정견과 자기가 하나가 된 상태다. 정견이 아닌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경우다. 이 상태가 가장 완벽한 상태다. 이 상태가 되면 정견이 없던 때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상태의 정견이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힘들면 정견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정견을 가지게 되어 편안하게 되면 거기서 멈춘다. 정견을 유지하는 노력이 없으면 눈에 안 보이게 퇴보가 일어난다. 그러면 안 된다. 계속 정견을 유지 발전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견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방법, 확실히 보지 못할 때는 모른다고 아는 것
그러면 정견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나. 먼저 정견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좋고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견이 없으면 너무 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단 이렇게 정견의 필요성이 확실히 자리 잡으면 정견을 갖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견은 그야말로 정확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정견의 반대는 잘못 보는 것이다. 정견을 확실히 가지기까지 먼저 잘못 보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견이 있기 전에는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잘못 보면서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견으로 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확실히 보지 못할 때는 모른다고 아는 것이다. 세계 4대 성자인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에 철저했던 사람이다. 자신이 잘못 보면서 안 좋은 영향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모른다고 알면서 정확하게 아는 노력을 하면 어느 날 알게 된다. 우리 마음은 아는 기능이 있다. 그 아는 기능에 방해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생각이나 감정이나 번뇌, 무지가 마음에 붙어 있으면 마음은 아는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모를 때 모른다고 하면서 모르는 대상에 자기 것을 붙이지 않고 유심히 보고 있으면 준비된 정도에 따라 알게 된다.
불교 수행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다 보면 어느 날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알게 된다. 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의 물리법칙을 아는 것도 눈으로 관찰하거나 필요하면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이용해서 자연현상을 관찰했을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필요한 실험을 통해 사물의 움직이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정견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통상적인 정신을 가지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기 것을 붙이지 않고 관찰해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계가 있다. 마치 우리 눈으로 손을 보면 손만 볼 수 있지 세포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손을 이루는 궁극적인 물질은 볼 수 없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통상적인 정신으로 정신 현상을 볼 때 한계가 있다. 정신 현상이 일어날 때 생기는 정신 인식 과정이나 정신을 이루는 근본 마음과 마음의 기능을 하는 마음 부수를 보지 못한다. 이런 것까지 알아야 우리 존재를 이루는 몸과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과거 생을 보고 현생과 과거 생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고 현재 생과 미래 생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봐야 우리 존재가 어떻게 해서 있고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빈틈없이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정견의 내용이다. 정견이 생기면 나와 세상을 보는 것이 달라지고 세상에 맞게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다.

전현수|부산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후에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받고 전문의가 되었다. 한양대 의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경정신과 2년차 때 불교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2003년에 미얀마에서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수행을 했다. 현재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이다. 저서로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전현수 박사의 불교정신치료 강의』, 『정신과 의사가 들려주는 생각사용설명서』, 『정신과 의사가 붓다에게 배운 마음치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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