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폭포에서
그림/글 이호신 화가
물도 인생도 흘러야 하리
하동 쌍계사 불일암의 불일폭포와 인연이 깊다.
14년 전 (2010년)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만났고, 불일암 주변에서 폭포를 바라본다는 ‘翫瀑臺(완폭대)’ 석각 글씨가 발견된 해(2018년)에도 험난한 협곡을 거슬러 폭포에 이르렀다.
까닭인즉 신라 때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로 문헌에 전해오던 것이 흙에 묻혔다가 다시 발견되어 지상에 화제가 되었었다. 소위 지리산의 청학동(靑鶴洞)이라고 불리는 쌍계사 뒷산의 ‘불일암 불일폭포’는 옛사람들이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서 많은 산행기와 시문을 남겼다.
나는 당시 현장의 석각을 탁본한 한지에 폭포 주변과 전체 이미지를 그렸다. 역사적 의미와 오늘의 만남을 증명하는 뜻으로. 그 후 8년 만에 국립공원 직원들과 또 비탐방길(출입제한 구역)로 바위를 타고 협곡을 가로지르는 모험을 단행했다. 졸작 이미지를 폭포 앞 안내판에 게시한다는 명분으로 작가를 부른 것이다.
정신이 아마득하고 허위허위 숨차게 계곡을 오르며 마주한 비경은 별천지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폭포는 무더위를 한꺼번에 날린다. 두려움도 기어오른 기억도 없다. 모든 언어와 관념이 잊히고 눈과 귀가 하나 되는 순간, 오롯이 피안의 세계로 느껴진다. 한편 폭포는 떨어지는데 양편 암벽의 솟구치는 형상은 마치 학의 날갯짓 같다 하여 청학동이라고 부르는 상상에 옷을 입힌다.
저 물은 정녕 어디서 오는가?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의미를 헤아리며 물길을 떠올린다. 물은 고이면 썩기에 떨어지고 또 여울로 흐르다가 계곡과 강을 만나야 바다에 이른다. 이 불일폭포는 쌍계사 계곡으로 섬진강으로 남해로 흘러 태평양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순간순간 깨어나야 하고 비우고 또 새롭게 흘러야 하리. 비껴갈 수 없는 길이라면 정면 돌파가 필요하다. 온 마음과 몸으로 마주하며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이를 때마다 삶의 폭포를 떠올리며!
“(…)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야 마음 또한 깊어질 수가 없다 (…)
끝 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오세영의 「폭포」 중)
이호신|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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