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행파와
‘유심(唯心)’ 사상
얀 웨스터호프
옥스퍼드대학교 불교철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유심이란 오로지 정신적 존재자들만 실재한다고 보는 유가행파의 입장
이전에 기고한 글에서는 대승불교의 두 주요 학파 중 반야계 경전들을 근간으로 하며 용수(龍樹)가 창시한 중관학파를 다루었다. 이번에는 『능가경(楞伽經)』, 『해심밀경(解深密經)』과 같은 텍스트들을 근간으로 하며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이 창시한 유가행파(瑜伽行派)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유가행파의 핵심 사상인 ‘유심(唯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유심이란 오로지 정신적 존재자들만 실재한다고 보는 유가행파의 입장으로서, 탁자나 의자와 같이 비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듯한 대상들까지도 모두 정신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언뜻 직관적이지 않아 보인다. 물질적 대상들은 정신적 대상들과 매우 다른 속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둘이 근본적으로 같을 수 있겠는가? 유가행파 사상가들은 유심의 입장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철학적 논증 모두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보았다. 『능가경』과 같은 유가행파의 주 경전들은 “이 삼계(三界)는 유심일 뿐이니, 자아(我)와 자아에 속한 것(我所)들로부터 자유롭다”고 지적한다. 즉 불교적 우주 전체(三界)는 본성상 완전히 정신적이라는 것이다.
세친의 『유식이십론』에도 실재론자가 설명해낼 수 있는 것들을
유심론자도 설명해낼 수 있다는 주장 등장
물론 유가행파 옹호자들이 유심 사상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불교 경전의 문증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많은 불교 사상가들이 실재가 본성상 완전히 정신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논증을 제시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가계 문헌 중 하나인 세친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에서는,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들이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가 설명해낼 수 있는 것들을 유심론자도 마찬가지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세친의 첫 번째 논점은 우리의 경험이 시공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길을 따라 한 방향으로 걷는다면 주변 건물들이 한쪽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면 같은 건물들을 역순으로 보게 될 것이다. 유가행파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실은 일련의 물질적 건물들이 특정한 공간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고 꼭 가정하지 않고서도 설명 가능하다. 가령 꿈이 아무리 무질서하더라도, 꿈속의 모든 사건들이 단일한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꿈속에서의 경험이 시공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는 하나, 그 누구도 꿈에서 인식하는 외부적 물체가 실제로 존재해 우리의 꿈속 경험에 시공간적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에 상응하는 외부의 시공간적 실재가 없더라도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구조화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유가행자들은 여러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대상을 볼 수 있는지도 설명해낼 수 있다. 가령 탁자와 의자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정신적으로만 존재한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탁자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친은 외부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실제로는 훈습, 습기와 같은 업종자(業種子)들이 우리의 심상속(心相續, mindstream) 안에서 무르익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무르익은 업종자들이 낳는 지각을 우리는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지각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앞서 제기한 의문에서의 두 사람은 이미 심상속에 유사한 습기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둘 다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같은 탁자를 동시에 인식하는 위의 사례에서는, 이들의 업종자가 동시에 무르익어 외부의 동일한 물리적 대상을 지각하는 듯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들을 통해 세친은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들이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가 설명해낼 수 있는 것들을 유가행자도 마찬가지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결론 지으면서, 더 나아가 유가행파의 이론이 그 존재론적 가정들에 있어서 더 간단명료하다고 주장한다. 실재론자는 정신적 대상과 물질적 대상 모두를 상정하고 둘의 상호작용까지도 설명해야 하는 반면, 유가행자는 정신적 대상만을 상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유가행파의 이론이 더 간단하므로, 세상에 대한 철학적 설명으로서 보다 적합하다는 것이다.
유가행파의 논증 통해 주체
-대상의 이원성 반박되면 탐, 진의 발생 또한 약화
유가행파 사상가들이 유심 이론에 입각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왜 해탈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유가행파는 물질적 대상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세계를 ‘여기 안’에 있는 인식 주체와 ‘저기 밖’에 있는 인식 대상으로 나누는 단순한 이해 방식을 흔들어버린다. 외부 대상이 있다고 믿었을 때 탐(貪)이나 진(瞋)과 같은 정신적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지는 자명하다. 우리는 좋다고 생각하는 외적 대상들은 취하려 하고, 추하거나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대상은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행파의 논증을 통해 이 주체-대상의 이원성이 반박되면 탐, 진의 발생 또한 약화된다. 실재하는 주체와 그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도 없으며 모든 존재자들이 그저 정신 현상의 응집인 세계에서는, 무언가를 취하거나 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습관적 경향성이 정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유가행파와 마찬가지로 인지과학적도
실제로 상호작용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정신적이라고 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유가행파의 유심 사상이 최근 인지과학 연구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듯하다는 점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우리가 세상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표상들의 인터페이스’를 통해서만 세상과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마치 컴퓨터와 상호작용할 때 사용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와 같이 말이다. 우리의 지각적 능력은 진화의 산물인데,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는 쪽으로 진화하기보다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과 ‘진화에 최대한 유리하도록 세상을 재현해내는 것’의 방향성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Donald Hoffman, The Case Against Reality: How Evolution Hid the Truth from Our Eyes, London: Penguin, 2020, 참조) 진화는 우리를 말 그대로 표상들의 세계에 가두어, 외부 대상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기껏해야 이론적 가설 정도로 축소시켰다. 유가행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지과학적 입장 또한 우리가 실제로 상호작용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정신적이라고 본다. 유가행파의 유심 사상은 다소 진부한 고대 인도의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세계,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현대적인 접근 방식들과 다양하고 흥미로운 접점들을 갖는다. 이 접점들의 발전을 통해 불교철학은 물론 인간 정신의 본성에 대해서도 더 깊고 정교하게 이해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번역|조연우·권건우
얀 웨스터호프(Jan Westerhoff)
케임브리지대학교와 SOAS 런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옥스퍼드와 더럼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현재 옥스퍼드대 불교철학 교수이자 레이디 마가렛 홀(LMH) 소속 펠로,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Ontological Categories』(2005), 『Nāgārjuna’s Madhyamaka』(2009), 『The Golden Age of Indian Buddhist Philosophy』(2018), 『The Non-Existence of the Real World』(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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