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우리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다
음악을 향한 사랑을 일깨우는 책들
정여울
작가
분명 여기에 있지만, 여기 없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음악 소리다. 피아노 소나타가 귓가를 간질일 때, 현악 사중주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 울려 퍼질 때,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이 온몸을 거대한 음악의 무지개로 감쌀 때. 우리는 분명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날아오르는 듯한 기쁨을 느낀다. 여기 이 세 권의 책은 내가 음악을 더욱 사랑하도록 만들어준 책들이자 음악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삶을 더욱 아름답게 연주하는 길임을 알려준다.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2번 피아노협주곡을 들을 때, 힐러리 한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을 때, 그리고 스티븐 이설리스의 콜 니드라이를 들을 때, 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젊은 날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던 시모어 번스타인은 어느 날 갑자기 주변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고별 콘서트를 해버리고 은퇴한다. 그에게 대저택을 제공해준 광팬도 있었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준 비평가들도 있었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충동적으로 은퇴한 것이 아니라 ‘꿈꾸는 삶’이 있었기에 오히려 은퇴 후에 더 행복했다. 무대공포증과 싸우고, 항상 완벽을 요구하는 청중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에 매번 노출되고, 비평가들의 따가운 비평에 전전긍긍하는 ‘프로페셔널’한 피아니스트의 삶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삶’을 되찾고 싶었다. 매일 최고의 음악을 듣고, 콘서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홀로 듣기 위해 피아노를 연습하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하며 한 명 한 명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매일 음악을 연주하고, 가르치고,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것.
그가 꿈꾸는 삶은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평범한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 속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아마추어의 순수함을 되찾는 것이었다. 드뷔시가 달빛에 스며든 사랑의 멜로디를 피아노 소리로 옮기는 순간을 재현해내는 것. 브람스가 불타는 사랑의 대상 앞에서 고백을 머뭇거리는 마음을 피아노곡으로 담은 순간을 온몸으로 재현해내는 것. 그는 바로 그런 음악의 순수한 기쁨을 매일 느끼고 싶었고, 그 기쁨을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는 비좁은 원룸에 살면서도 부를 갈망하지 않으며 오직 음악을 사랑하는 일 그 자체에 인생을 바친다. 성공의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고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기로 한 그의 선택은 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음악을 노래하는 이야기이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철학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 음악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는 시모어 번스타인과는 달리 긴장감 가득한 콘서트를 즐긴다. 디아파종 황금상과 그래미상(최우수 실내악 퍼포먼스)을 수상했고, 임윤찬이 1위를 차지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 심사위원이자 참가자 필수곡 ‘팡파레 토카타’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과 늘 함께하는 법, 음악이 우리 삶에 커다란 위로와 깨달음을 주는 이유를 대중에게 들려주는 책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잠깐씩 머물다 콘서트를 마치고 그 도시를 떠나는 삶의 외로움과 즐거움,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 음악가로서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을 들려주기도 한다. ‘음악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를 권하고 싶다. 그는 클래식 음악은 ‘현실도피’가 아니며,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 그 자체를 깊이 탐구해 인간 존재의 심연 속으로 여행하는 아름다운 지적 여정임을 이야기한다. 그는 음악은 진통제가 아니라 항생제에 가깝다고도 이야기한다. 진통제는 잠깐 아픔을 누그러뜨리지만, 항생제는 고통이 심화되지 않도록 우리의 몸 자체를 강하게 만들어주므로.
◦ 특별한 건 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들려주는 책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사람들은 피아니스트의 ‘손’을 궁금해한다. 그들의 손은 뭔가 특별하게 생겼을 거라고, 뭔가 더 사색적이고 뭔가 더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라고, 여하튼 ‘일반인’과는 매우 다를 거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는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주세요’라고 요구하는 팬들을 향해, 특별한 건 피아니스트의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들려주는 듯하다. 그는 놀랍게도 자신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고 말한다. 항상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숙소를 잡아 전 세계를 여행하는 삶이기에.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매우 외로워 보이지만 실은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고 고백한다. 때로는 한 남자, 한 여자를 위해 연주하고, 때로는 이미 죽었지만 피아니스트의 가슴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고, 때로는 이 세상을 떠난 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느낌이라고. 피아니스트의 고요하고 사색적이면서도 치열한 삶을 보여주는 세 권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내가 매일매일 나도 모르게 실천하고 있었던 고요한 마음챙김의 길임을 깨닫는다.
정여울
작가. KBS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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