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은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불교와 뇌과학

뇌과학은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상헌
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사진은 명상 중인 티베트 스님들의 뇌파 연구 모습(사진_현대불교신문)

모든 불교 수행자는 물론이고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불자들도 궁극에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어휘를 일상적인 맥락에서도 종종 사용한다. 깨달음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하고 궁리하다가 알게 됨’이다. 일상적인 맥락에서의 깨달음은 기본적으로 앎, 즉 인식적 활동이다. 우리가 알려고 애쓰고 궁리하던 것에 관해 어느 순간 앎에 도달할 때 우리는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일상적인 경험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깨달음과 같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으로서의 깨달음을 얻는데 오랜 기간의 끈기 있는 수행이 필요하지는 않다. 불교의 깨달음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지고의 지혜를 말하며,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열반에 들었다는 말과 같다. 혹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수행자가 도달하려는 궁극의 상태이다.

우리가 깨달음을 구하는 이유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조건에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재론적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시작한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 skandha)으로 구성된 존재인 인간은 신체적 및 정신적 고(苦, duhkha)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는 불성이 있다. 이것을 흐리고 어둡게 하는 온갖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불성을 밝히고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삶은 고(苦)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노력을 통해 고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 체험의 신경학적 기초
이제 이 글의 제목으로 던진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뇌과학은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언급한 불교의 깨달음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그것을 가리킬 것으로 짐작한다. 문제는 뇌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설명한다는 말인가?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과 원리를 해명한다는 말인가? 깨달음에 도달한 상태에 대해 과학적으로 기술한다는 말인가? 뇌과학이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내게는 분명하지 않다. 뇌과학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과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설명이 원리 혹은 법칙적 진술을 통해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면, 뇌과학이 깨달음에 대해 설명한다는 말을 수긍하기 어렵다.

간질 발작에 대한 연구에서 발단이 되어 이른바 영적 체험의 신경학적 근거에 대한 탐구가 다수 진행되었다. 행동신경학의 창시자인 미국의 노먼 게슈빈트는 간질 발작이 때때로 종교적 체험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도 바울, 잔 다르크, 도스토옙스키 등이 간질 발작을 통해 신비 체험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마이클 퍼싱어는 측두엽 간질 발작 환자에게서 발작 증상이 일어나는 동안에 영적 체험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인위적으로 측두엽을 자극함으로써 유사한 경험을 이끌어내는 실험을 했다. 영적 체험이란 우주와 일체가 되고 세상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인데, 간질 발작 과정에서 환자가 이런 경험을 하며 그 장소는 대뇌 측두엽이라는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앤드루 뉴버그와 유진 다칼리는 티베트 명상 수행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명상의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수행자의 뇌 상태를 단일광자방출 컴퓨터단층촬영(SPECT) 장치로 측정했다. 명상의 최고점에 도달할 때 후상부두정엽이라 불리는 뇌의 특정 부위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했다. 후상부두정엽은 물리적 공간에서 인체의 방향과 위치를 정해주고 자기 자신과 자신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능을 한다. 명상의 최고 상태에서 수행자들은 궁극적 존재와의 합일,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의 소멸 등을 경험하는데, 후상부두정엽의 일시적 기능 감소 혹은 정지가 원인인 듯하다. 뉴버그는 기도에 몰입한 프란체스코 수녀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래서 뉴버그는 영적 체험이 신비스러운 환상이 아니라 신경과학적 근거가 있는 두뇌 현상임을 증명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계 도처의 인류 문명에서 두루 발견되는 종교 및 영성이 인간 뇌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영적 체험이 가능하며, 우리의 뇌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불교 트랜스휴머니즘
인류의 주요 종교 전통 가운데 과학기술에 가장 개방적인 것이 불교이다. 이 말은 불교가 과학기술에 대해 가장 우호적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진의는 불교가 과학기술과 가장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과학과 기술이 등장하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옹호한다고 파문되는 일도 없다. 최근 트랜스휴머니스트들 가운데 불교적 성향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의 공통점을 강조하며 양자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른바 불교 트랜스휴머니즘(Buddhist transhumanism)이다.

일단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이 목표에 있어서 다르지 않으며, 과학기술을 방편으로 이해한다면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이 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의 여러 공통점을 거론한다. 불교는 인간의 현재 상태를 완성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 존재의 변화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상태, 완성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트랜스휴머니즘 역시 현재의 인간 존재를 불완전한 것으로, 미완성의 것으로, 그리고 변화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선불교 수행자이자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마이클 라토라(Michael LaTorra)는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의 공통적인 목표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온갖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고통 없는 행복한 삶을 얻는 것, 인간 삶의 공동체적 조건과 개인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 그리고 인간성을 더 높은 상태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의 수행 방법과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방법은 다르지만, 후자의 기술에 의한 인간 향상(enhancement)의 방법이 불교적 수행법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며, 특히 대승불교는 방편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했음이 거론된다. 그래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 방법과 자신들의 기술적 향상의 방법이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불교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휴머니즘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마무리: 신경중심주의
중국 선종의 육조대사 혜능은 오조홍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 들은 『금강경』 강설에서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마땅히 머무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생기게 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문구가 육조 혜능을 깨달음에 이끈 법문이다. 혜능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혜능의 뇌가 이전과는 다른 전기화학적 상태, 혹은 생리적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이다. 깨달음 이전과 깨달은 이후에는 무엇이 달라지는가? 우리의 뇌가, 뇌의 상태가 변화된다. 위의 물음과 답변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깨달음을 뇌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으려면 깨달음은 뇌의 작용 혹은 기능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뇌와 관련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은 모두 뇌의 활동 결과라는 가정을 수용해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가정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 인간을 정의하는 모든 것, 우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뇌의 전기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이런 경향을 신경중심주의라고 규정한다. 신경중심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뇌’이다. 신경중심주의는 더 넓게 보면, 모든 앎이 자연과학적 탐구를 통해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인 자연주의에 뿌리 박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뇌로 환원하는 생물학적 자연주의의 일종이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신경중심주의는 ‘인간의 모든 정신 상태를 뉴런 활동(곧 뇌의 부분들)을 통해 산출되는 과정과 동일시한다.’

인간의 마음을 심리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얼마 전까지 이어졌었다. 1990년대부터는 인간의 마음은 다름 아니라 뇌의 활동이므로 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과 같은 질문도 제기된다. ‘뇌과학은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려는 이들은 다음을 가정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복잡한 뇌를 가진 신경생물학적 인간(Homo neurobiologicus) 혹은 신경기계이다. 그런데 왜 이 신경기계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이 신경기계라는 가정 아래에서 이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나로서는 찾을 수 없다. 인간이라는 신경기계의 숙명인가, 아니면 오류인가? 혹시 인간의 생물학적 생존에 긍정적 기여를 했던 진화적 잔재인가?

이상헌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칸트철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철학, 과학기술에 말을 걸다』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기후변화와 개인의 의무」, 「도덕적 향상이 기후변화의 대책이 될 수 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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