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보는 감정|현대인의 감정,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불교에서 보는 감정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교는 감정을 느낌 수(受)라 불러…
느낌은 업보의 연속으로서의 윤회적 삶을 성립시키는 중심 역할
감정은 개념적인 명료한 인식 이전에 또는 인식과 무관하게 우리가 내적으로 느끼는 주관적 마음 상태를 말한다. 불교는 이러한 감정을 느낌 수(受)라고 부르는데, 수는 인간을 구성하는 5온의 하나로서 물리적 색(色)이 아닌 심리적 명(名)을 이루는 수·상·행·식 중 첫 번째 구성물이다. 느낌 수가 있고 나서 개념적 인식 작용인 지각 상(想)이 일어나고 이어 업을 짓는 의지 작용인 행(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수·상·행의 심리 작용을 총괄하는 앎인 식(識)이 성립한다.

불교의 12지연기에 따르면 느낌 수는 근·경·식 3사(事)의 화합인 촉(觸)에 의해 일어나는 수동적 결과인 보(報)이면서 또 동시에 그다음의 능동적 업(業)인 애(愛)와 취(取)를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업의 보로 일어나서 동시에 미래 업을 일으키는 인연이 된다는 점에서, 즉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면서 보에서 그다음 업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느낌은 업보의 연속으로서의 윤회적 삶을 성립시키는 중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느낌이 지난 업의 보라는 것은 느낌이 과거의 결과로써 그냥 주어지는 것이지 나의 현재적 선택이나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느낌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밀려오는 것이며, 나는 그렇게 밀려오는 느낌을 그저 수용할 뿐, 있는 느낌을 억지로 없게 하거나 없는 느낌을 인위적으로 있게 만들 수가 없다. 느낌이 의식적 판단이나 의지적 결단과 무관하게 내게 밀려온다는 것은 그 느낌의 시작과 끝이 내게 가려져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만큼 그 안에 나와 세계의 존재에 대해 의식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의식으로 분별하지 못하는 나의 심신의 상태 및 나와 타인과의 관계 또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느낌을 통해 직감하기도 한다. 의식이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 존재의 흐름, 불교가 논하는 만물의 연기적 상호 의존 관계는 의식의 개념적 사려분별 이전에 느낌으로 다가오며 느낌으로 포착되는 것이다.

느낌은 알아차림이 중요…
사념처관에 느낌을 관하는 수념처관이 속한 것도 이 때문
그런데 우리가 느낌을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느낌을 전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이며 그 느낌에 의해 좌지우지되거나 그 느낌을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느낌은 알아차림이 중요하다. 자신의 느낌을 느낌 그 자체로 그대로 알아차리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삶의 태도와 방향을 결정짓는다. 즉 범부로 머무르는가 수행자가 되는가를 결정짓는다. 붓다가 강조한 수행법인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느낌을 관하는 수념처관(受念處觀)이 속한 것이 이 때문이다. 사념처관은 네 가지 염처, 즉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하는 것이며, 신념처관과 심념처관 사이에 행하는 수념처관이 바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수념처관에서는 자신의 느낌이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아차리되, 그러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세분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불교는 느낌을 신체적인 몸의 느낌인 신수(身受)와 심리적인 마음의 느낌인 심수(心受) 둘로 구분한다. 그리고 신수를 다시 즐거운 느낌인 낙수(樂受)와 괴로운 느낌인 고수(苦受)로 구분하고, 심수는 기쁜 느낌인 희수(喜受)와 슬픈 느낌인 우수(憂受)로 구분하며, 그 외에 비고비락 또는 비희비우의 사수(捨受)를 말한다.

수행자는 수념처관에서 자신의 느낌이 고수이면 고수로, 낙수이면 낙수로, 사수이면 사수로 알아차려야 하며, 결국은 자신이 고수 또는 낙수 또는 사수를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을 그 자체로 알아차리고 자신이 그 느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곧 스스로 그 느낌에 매몰되지 않고 느낌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을 느끼다가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불안의 깊은 수렁으로부터 한 발짝 빠져나올 수 있듯이 알아차림은 대상과의 탈동일시, 즉 대상에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남을 의미한다. 느낌을 느끼되 느낌에 거리를 둠으로써 느낌에 의해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수에서 심수로 이행하게 하는 두 번째 화살의 출처는
바로 자기 마음속 번뇌인 탐·진·치
그런데 수념처관의 궁극 지향점은 자신의 느낌을 세밀히 알아차림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느낌이 낙수나 고수의 신수인지 아니면 희수나 우수의 심수인지를 구분해 신수에서 심수로 자동이행해가는 것을 멈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듯이 신수와 심수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신수가 반드시 심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두 번째 화살’의 비유는 바로 이 점을 통해 범부와 수행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범부는 몸이 고통스러우면(고수) 곧 마음이 슬퍼지고(우수), 몸이 즐거우면(낙수) 곧 마음이 기뻐지는(희수) 식으로 신수에서 심수로 자동 이행해가는 데 반해, 수행자는 신수와 심수의 차이를 알아차림으로써 신수가 있어도 심수로 나아가지 않는다. 신수의 첫 번째 화살을 맞아도 심수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이다. 신수의 첫 번째 화살은 바깥으로부터 날아오는 것이지만, 심수의 두 번째 화살은 본인 스스로 자신에게 쏘는 화살이며, 수행자는 그것을 알기에 스스로 두 번째 화살을 쏘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 것이다. 신수에서 심수로 이행하게 하는 두 번째 화살의 출처는 바로 자기 마음속 번뇌인 탐·진·치이다. 탐심이 작동해 낙수가 희수를 낳고, 진심이 작동해 고수가 우수를 낳는데, 수행자는 자신의 탐·진·치를 관해 탐·진·치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신수에서 심수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느낌을 관하는 수념처관은 마음의 느낌 내지 마음속 탐·진·치의 번뇌를 알아차리는 심념처관으로 이어진다.

느낌 내지 감정 안에 중생의 윤회를 성립시키는
업과 보의 연결 고리 감추어져 있어
이렇게 보면 불교에서 감정은 몸의 느낌인 신수와 마음의 느낌인 심수인데, 신수는 순수하게 지난 업의 보인데 반해, 심수는 마음속 탐·진·치에 이끌려 내가 스스로 일으킨 느낌이란 점에서 그다음의 업 지음의 단초가 된다. 즉 희수와 우수를 따라 애(愛)와 증(憎)을 일으키고, 애와 증을 따라 취(取)와 사(捨)의 분별적 선택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2지연기에서의 수에서 애로의 이행, 보에서 업으로의 나아감이 있게 된다. 이처럼 느낌 내지 감정 안에 중생의 윤회를 성립시키는 업과 보의 연결 고리가 감추어져 있다.

새로운 업 지음을 야기하는 것은 인간 마음속 번뇌인 탐·진·치이다. 불교는 여기에 아만(만)·의심(의)·바르지 않은 견해(견)를 더한 탐·진·치·만·의·견 여섯 가지를 ‘번뇌적 마음 작용’이란 의미에서 ‘번뇌심소(煩惱心所)’라고 부르고, 그러한 번뇌심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적 감정을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 작용’이란 의미에서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라고 부른다. 분함(분)·원통함(한)·괴로움(뇌)·시기심(질)·들뜸(도거)·혼미함(혼침) 등이 그것인데, 불교는 그런 부정적 감정인 수번뇌심소를 대·중·소 세 가지로 구분해 논한다. 수번뇌심소의 이름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자는 감정을 알아차림으로써 번뇌를 벗은 긍정적 감정을 느껴
인간에게는 탐·진·치·만·의·견 등 번뇌에 이끌린 부정적 감정이 대부분이지만, 수행자의 자세로써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은 번뇌 너머로 나아가고, 감정은 긍정적 감정으로 변환된다. 번뇌를 알아차림으로써 번뇌 너머로 나아간 마음이 느끼는 감정은 더 이상 탐·진·치에 물든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번뇌를 벗은 긍정적 감정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그런 긍정적 감정을 수번뇌심소와 구분해서 ‘선심소(善心所)’라고 부른다.

자신의 부정적 감정 및 그런 부정적 감정의 근원이 되는 마음속 번뇌를 알아차림으로써 우리는 긍정적 감정을 갖게 되고, 그러한 긍정적 감정을 바탕으로 일체 존재가 불이(不二)라는 깨달음 및 동체대비의 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번뇌에 이끌리는가 번뇌를 넘어서는가는 자신의 느낌, 감정을 얼마만큼 여실하게 알아차리는가에 달려 있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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