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란 무엇인가?
김학진
고려대학교 심리학부 교수
뇌과학 이론에 따르면 감정이란 일종의 ‘뇌와 신체 간 소통 장애’
우리는 일상에서 감정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자주 사용하지만 과연 감정이 정확히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기능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최신 뇌과학 이론에 따르면 감정이란 일종의 ‘뇌와 신체 간 소통 장애’로 정의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감정에 대한 생소한 정의가 아닐까 싶다.
알로스테시스,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예측하고 방지하기 위해
외부 환경을 활용하는 뇌의 기능
우리가 인식하건 하지 못하건 우리 뇌는 끊임없이 신체의 내부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처럼 뇌가 신체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이유는 바로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감지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다. 예를 들어 체내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게 되면 뇌는 배고픔이라는 ‘감정’을 만들고 이 감정은 음식을 찾아 섭취하는 행동을 촉발해 다시 에너지 수준을 회복하도록 만든다.
이미 신체 항상성이 깨진 뒤에 이를 회복하는 것은 사실 그리 좋은 전략은 아닐 수 있다. 때로는 이미 발생한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혹은 아예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막 한복판에서 갈증을 느끼게 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사막에 들어오기 전 미리 물을 준비해왔거나 오아시스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면 이 갈증은 해소되기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 뇌는 끊임없이 미래에 발생할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예측하고 방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외부 환경을 활용하게 된다. 사막에 들어오기 전 물을 준비하거나 오아시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바로 외부 환경을 활용하는 좋은 예들이다. 이처럼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예측하고 방지하기 위해 외부 환경을 활용하는 뇌의 기능을 ‘알로스테시스’라 부른다.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해소시켜주는 대상인
일차적 보상과 이차적 보상, 사회적 보상
뇌과학적으로 보상은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해소시켜주는 대상으로 정의된다. 물이나 음식처럼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직접적으로 해소해주는 대상은 일차적 보상이다. 뇌의 알로스테시스 기능은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예측하고 방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새로운 보상, 즉 이차적 보상을 외부 환경에서 찾아 학습하도록 돕는다. 이차적 보상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돈이다. 돈은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미리 방지해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돈은 배고픔, 갈증, 추위 등 다양한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포괄적으로 해소시켜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 보상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보상이다. 이 효율성이라는 장점 덕분에 돈이라는 이차적 보상은 처음 학습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일단 학습되고 나면 다른 어떤 일차적 보상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보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또한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뇌의 알로스테시스 기능 덕분이다.
돈보다 훨씬 더 먼저 학습되고 더 강력한 보상이 있는데 그건 바로 타인이라고 하는 사회적 보상이다. 갓난아기는 출생 직후부터 배고픔과 추위와 같은 다양한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마다 이를 해소시켜준 것은 바로 ‘엄마’라고 하는 타인이다. 끊임없이 엄마의 관심을 끌고 보살핌을 얻어내는 것은 갓난아기들에게는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이다. 갓난아기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어떤 행동이 엄마로부터 보살핌을 얻어내고 신체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서서히 학습해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학습된 사회적 보상은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불특정 다수로부터 호감과 인정을 받기 위한 인정 욕구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인정 욕구는 질투심, 부러움, 수치심, 죄책감, 당혹감, 자부심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감정의 원인이 되며, 도덕적 선택, 이타적 행동, 공정성 판단 등 수많은 사회적 행동들의 기저에 자리 잡은 핵심적인 동기가 된다.
알로스테시스의 분배 기능과 과부하
알로스테시스가 담당하는 또다른 중요한 기능은 바로 분배 기능이다. 모든 신체 기관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각자의 불균형을 알리는 신호들을 뇌로 보내서 알린다. 이런 수많은 신호들에 모두 일일이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뇌는 그 신호들 중에서 시급한 것에 먼저 대응하고 덜 시급한 것들은 잠시 우선순위에서 밀어낸다. 예를 들어 사나운 맹수가 나를 쫓아오는 위기의 순간에는 일단 모든 신체의 자원을 맹수로부터 도망치는 데에만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고, 심지어 조금 전에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까지 끌어와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자원의 편중된 분배가 일시적으로만 나타나고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사라진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약 위기 상태가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나 직장 상사로부터 갈굼을 당하고 있는 직원의 경우는 마치 맹수에게 쫓기는 듯한 상태가 24시간 내내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알로스테시스의 분배 기능은 신체 항상성 유지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보상들에 우선 순위를 매기게 되는데 이 순위 리스트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는 보상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것들이다.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뇌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보상들에 더 우선순위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어떤 보상보다 효율적인 보상인 사회적 보상은 당연히 높은 우선순위를 받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항상 신경 쓰고 나의 이미지와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은 바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뇌의 알로스테시스 기능의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뇌가 효율성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바로 다양성이다. 신체 각 기관들이 보내는 불균형을 알리는 신호들 중 많은 것들을 무시하고 가장 효율적인 보상인 타인의 인정과 호감을 얻기 위한 노력에만 모든 자원을 투자하는 것은 뇌와 신체 간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고 신체뿐 아니라 심리적 상태의 균형점을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바로 이런 상태를 ‘알로스테시스 과부하’ 상태라 부른다.
자기 감정 인식은 뇌의 알로스테시스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과정
알로스테시스 과부하를 방지하기 위한 뇌과학적 방법은 바로 자기 감정 인식이다. 자기 감정 인식이란, 감정을 경험하는 순간 그 감정의 원인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앞서 감정이란, 뇌와 신체 간의 소통 장애, 즉 뇌가 신체 상태를 예측하는 데 실패한 상태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예측하고 방지하는 것이 뇌의 기능이라면 이미 예상치 못한 불균형이 발생했거나 혹은 미래에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음이 감지된 상태가 바로 감정이다. 누군가로부터 비난의 말을 들었을 때 수치심 혹은 분노의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 비난이 미래에 나에게 발생할 수 있는 생존의 위기를 뇌가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나에게 이런 불균형을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함을 알린다.
감정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이 감정을 빠르고 쉽게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지, 아니면 느리지만 좀 더 신중하게 그 원인을 찾아 정확히 해결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맹수가 쫓아오는 상황과 같은 경우는 당연히 오랜 경험을 통해 그 효과가 잘 검증된 익숙한 반응을 신속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복잡한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은 적절한 반응을 찾기 전에 좀 더 신중하게 맥락을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빠르고 익숙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감정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온 뇌에게 이런 방법은 매우 어려운 감정 해소 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익숙한 방식을 선택해서 감정을 해소할 경우 불균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승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차 커지면서 어느 날 동료의 사소한 농담이나 무심코 던진 가족의 걱정이나 질문에 발끈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충동적인 감정 해소 방식이 반복되어 점차 습관으로 굳어지게 되면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경계심을 갖게 되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으로 변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 감정 인식은 신체 항상성을 더 잘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뇌의 알로스테시스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알로스테시스 과부하는 신체 항상성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알로스테시스 기능이 그 목적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점차 외부 환경을 활용하기 시작하게 되고 어느 순간 신체 내부보다는 외부 환경의 신호에 더 집착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 과정은 신체 항상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차적 보상보다 외부 환경을 통해 학습된 이차적 보상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은퇴 후의 삶과 같이, 실제로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먼 미래에 발생할 신체 항상성 불균형을 예측하는 외부 환경 신호에 더 몰입하고, 정작 바로 지금 신체가 보내는 크고 작은 불균형의 신호들은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리고 이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 감정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감정 인식은 감정의 언어적 분류를 다시 해체하고 재구성해
최적의 감정 해소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
감정 인식은 현재 느끼는 감정을 단순히 언어로 분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감정을 분류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언어라는 틀을 깨부수는 것에 더 가깝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불쾌함을 느꼈을 때 이 감정이 수치심인지 분노감인지 단순히 언어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불쾌감을 유발한 원인이 나의 왜곡된 인정 욕구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 때문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감정 인식은 반드시 행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신체 상태와 외부 환경이 만들어내는 무한대의 조합을 억지로 범주화시켜 만들어낸 감정의 언어적 분류를 다시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최적의 감정 해소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높은 강도의 감정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감정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감정의 이면에는 대부분 인정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정 욕구를 감추도록 교육받고 훈련받아왔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인정 욕구가 빚어낸 표면적인 감정만 느낄 수 있을 뿐 그 주된 동력인 인정 욕구를 알아차리기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 혹은 알아차리더라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다른 이유를 찾아내려 노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원인을 타인에게 돌려 비난하거나 혹은 자신을 혐오하게 되기도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 감정 인식이다. 겉으로 드러난 감정의 이면에 숨겨진 인정 욕구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순간, 인정 욕구는 이내 힘을 잃어버리고 이 욕구가 힘을 실어주고 있던 감정 또한 빠르게 사그라들게 된다. 감정의 에너지가 줄어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자신의 현재 신체 상태와 외부 환경을 보다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나에게 더 이로운 선택을 찾을 여유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감정 인식의 힘이다.
김학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에서 계산신경과학 석사 학위를, 미국 위스콘신주립대에서 생물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2007년부터 현재까지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정 욕구, 자존감, 공감, 도덕성, 이타성 등의 신경학적 기제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뇌는 어떻게 자존감을 설계하는가』,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 구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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