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 중 유일한 불교 유산, 공주 갑사 철 당간 지주|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바람에 열정적으로 나부끼는
뜨거운 깃발이 되어주렴

공주 갑사 철 당간 지주


가장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계절,
갑사 가는 길
눈 내린 계룡산은 동면하는 용의 비늘들이 살얼음에 뒤덮인 것처럼 조용히 숨을 고르는 중이다.

겨울이다.

내가 있는 이곳 공주는 경계가 많은 곳이다. 1500년 전 약 64년간 백제의 도읍을 지키던 국경이자 왕궁을 품은 공산성이 있고, 천 년 세월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리다 고려 시대로 바뀌며 공산성으로 이름이 달라진 그 경계의 시간에도 금강변의 뱃사공과 농사꾼들, 사하촌의 마을 사람들은 이 땅에 들풀처럼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 계룡산 갑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저 사내도 계룡산 사하촌에 살던 어느 화전민의 후손이다. 그래, 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 수많은 할아버지들이 뻗어나가 임진왜란 때에는 갑사의 영규대사와 승병들이 청주까지 승전보를 울릴 때 함께 있었고, 금산에서 모두 전사할 때 너의 할아비도 있었지. 그런데 너는 도시에서 태어났으니 잊을 만도 한 천 년 세월이건만, 어떤 인연으로든 너의 발길이 닿게 했구나.

요즘 사람들의 기준에서 갑사는 계절 불문 사람이 많은 곳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후로, 발 닿는 곳마다 문화재에 1500년 역사를 지닌 데다, 소원 기도 도량이자, 화엄종 10대 사찰로 불리니 그나마 겨울이 사계절 중에 가장 호젓하게 갑사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다.

한·중·일 3국 중 유일한 불교 유산
– 나는 갑사 철 당간이다
내 키는 15m, 나는 갑사의 철 당간이다. (공주 갑사 철 당간/ 보물 제256호/ 통일신라)

중국이나 일본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만의 불교 유산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철 당간은 청주 용두사지 철 당간과 나, 둘뿐이다. 내 몸은 단단한 철로 15m를 세워 하늘을 찌를 듯 솟았고, 대나무 마디처럼 24마디의 철주가 아름답다고들 말한다. 사실, 28개의 철통을 이은 것이었는데, 고종 때였나…. 1893년쯤에 네 도막이 부러져버려 지금은 24마디만 남았다.

차갑고 강인한 철이 가지는 이미지는 영원과 같았다. 불법을 지키는 사찰의 승려들처럼, 큰 기도나 설법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승려들은 불화나 깃발을 내 몸에 달아 사람들에게 뜨거운 불심을 가지라 손짓했다. 내 몸에 붙어 바람에 펄럭이는 불화를 보며, 사람들은 수많은 마음을 느꼈는데 그중에 어떤 이는 부처님에 대한 발심을,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연심을 소원했다. 나는 그렇게 깃발의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 참…, 좋았다.

사랑이 변하니?
-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남녀
대적광전 아래에서 추억에 잠길 때면 옛 연인을 생각하듯 내 차가운 철 당간 스물네 마디 몸에도 따스한 시간이 도는 것 같다. 특히, 영원을 산다는 철 당간으로 1500년을 살면서 ‘강철보다 강하고, 용광로보다 뜨거운 것’을 목격한 그때를 떠올리면 더 그렇다.

신라 선덕여왕 때 도력이 높았던 상원대사가 지금의 갑사 터에서 움막을 치고 수도하던 어느 날, 큰 호랑이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을 알고 가시를 뽑아주었더니 얼마 후 호랑이가 처녀를 물어다놓고 사라졌다. 그녀는 상주에 사는 김 화공의 딸이었다. 겨울이라 눈이 너무 쌓여, 두 사람은 봄이 올 때까지 계룡산에 머물러야 했다.

봄이 되자 상원대사는 처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처녀는 겨우내 자란 스님에 대한 사랑과 불심을 그제야 털어놓았다. 상원대사는 김 화공의 집에 머무르며 처녀와 여러 날 의논 끝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승화시키기로 했다. 의남매를 맺은 것이다. 남매가 된 두 사람은 함께 계룡산으로 돌아와, 각자의 암자를 마련하고 불도를 닦는 승려로 일생을 살며 후학을 양성했고, 나이 들어 입적해 남매탑에 묻혔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남녀가 차가운 머리와 실천으로 만들어낸 통일신라 최고의 사랑. 그들의 사랑은 살아낸 시간이 곧 법문이 되었다. 절에서 설법이 있는 날이면 내 몸을 쓰다듬으며 깃발을 올리던 그들의 손길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갑사 철 당간 위에 뜨거운 그 깃발이 보인다면,
너는…
사내가 호젓하게 갑사의 겨울을 걷고 있다. 너는 어떤 인연으로 살고 싶으니?

혹시 너무 나처럼 강철 같은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에게 바람에 열정적으로 나부끼는 뜨거운 깃발이 되어주렴. 천 년의 인연을 만난 것 같다면, 사랑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변해가는 방향이 올바르다면 너의 사랑은 옳다.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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