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공부하는 절, 봉선사와 광릉 숲 | 치유의 숲, 사찰림을 가다

숲속의 절집,
세상 사람들의 평생 학교

봉선사와 광릉 숲

글/사진 은적 작가


숲은 우리의 육신을,
절은 우리의 정신을 숨 쉬게 한다
‘숲’이라는 글자는 ‘숨’이라는 글자와 닮았습니다. 글자 모양이 그저 닮은 정도라면 그 의미는 ‘구름과 비’처럼 혈육적으로 가깝습니다. 숲은 지구의 숨이고 우리는 그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숲을 매개로 우리는 대지와 연결됩니다.

‘숲’이 우리의 육신을 숨 쉬게 한다면 ‘절’은 우리의 정신을 숨 쉬게 합니다. 숲과 절, 사실상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불교는 숲의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無憂樹) 아래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었고, 쿠시나가라의 숲속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율장에서 보여주는 초기 불교 수행자의 거처는 숲속의 나무 아래였습니다. 그것을 수하주(樹下住)라고 하지요. 출세간의 수행자가 세상의 주인으로 세상을 사는 방법입니다.
봉선사 대웅전. 1970년 운허 스님이 중건할 때 대웅전 편액을 '큰법당'으로 바꿔 걸었다.
한국 최초의 한글 편액이다.

봉선사는 숲속의 공부하는 절
봉선사 하면, 운허 스님과 역경(한글대장경), 운허 스님을 이어 역경 불사를 회향한 월운 스님과 능엄학림 그리고 광릉, 광릉 숲(국립수목원)이 연상됩니다. 봉선사는 광릉 숲속의 공부하는 절입니다.

절과 숲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봉선사 ‘여름 숲속 학교’가 일러줍니다. 여름 숲속 학교는 월운 스님(1929~2023)이 1973년 7월 20일 어린이 포교 방편으로 ‘하계임간학교(夏季林間學校)’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첫 회에 자원봉사자 선생님 7명에 5명의 어린이가 참가해 월운 스님이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스님의 안목이 얼마나 앞섰는지를 알게 합니다. 숲속의 절집. 세상 사람들의 평생 학교입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를 중창할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
거듭되는 병화에도 살아남아 500여 년 동안 봉선사를 지켜봤다.

봉선사는 969년(고려 광종 20) 법인 국사가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합니다. 지금의 이름은 1469년부터입니다. 세조(1417~1468)의 무덤인 광릉을 운악산(275m) 아래에 조성하면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1418~1483)가 선왕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 ‘봉선사’라 했다 하지요. 1550년(명종 5)에는 교종의 수사찰로 우뚝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까지 거듭 화를 입으면서 중창을 반복했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다시 일으켜 세운 결과입니다.

봉선사를 말할 때 ‘큰법당’이야기를 뺄 수 없겠지요. 오늘날 『한글대장경』의 초석을 다진 운허 스님이 1970년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큰법당’으로 편액을 바꾸었습니다. 최초의 한글 편액입니다. 서예가 금인석(1921~1992)의 글씨입니다. 큰법당의 주련도 한글인데 대중 교화의 자비보살이었던 석주 스님(1909~2004)의 글씨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봉선사 가는 길을 푸른 광휘로 밝히는 전나무

봉선사는 마당이 활짝 열린 절입니다. 예전에 논밭이었던 그곳은 연못으로 바뀌어 새들이 목을 축이고 구름이 쉬었다 갑니다. 여름엔 연꽃 가득 별세계를 이루어 우리 사는 이곳이 극락임을 일깨웁니다.

봉선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하면 광릉 숲의 내밀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봉선사에서 국립수목원까지 봉선사천을 따라 걷는 광릉 숲길(3km)도 봉선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말라 얼어붙은 연. 다시 올 봄, 여름, 가을이 여기 있다.

겨울 아침 봉선사 연못가를 걸었습니다. 느티나무와 바람이 밤새 나눈 얘기가 하얗게 상고대로 피었습니다. 내 귀로는 그 얘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봉선사 부처님께 여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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