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말하는 업|업(業)은 숙명이 아니다

업과 현대 과학

김성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중생의 운명, 별업(別業)과 중생이 사는 세계까지 결정된다는 공업(共業)
업의 개념은 종교와 사상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불교의 업사상만을 고려할 것이다. 불교에서 업을 말할 때는 의도(cetanā)를 중시한다. 그러나 불교가 업에서 의도를 강조한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문제 때문에 인간의 의식적 행동을 중시한 것일 뿐, 경전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업은 다음 세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셋이란 (1) 외적인 자극 (2) 의식적 동기 (3) 무의식적 동기를 말한다. 이것은 업을 인간의 일체의 행위로 보는 것과 가깝다.

업은 종교적 개념이긴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과 윤리와도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업의 작용과 영향은 그 범위가 중생의 운명[別業]뿐만 아니라 중생이 사는 세계까지 결정된다고[共業] 말하는데, 이것은 과학에서도 연구 검토하고 있거나 과학적 연구 내용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다. 첫 번째의 것, 즉 별업은 뇌/신경과학과 심리학 및 후성유전학에서 연구하는 내용 중 하나이고, 두 번째 문제, 즉 공업은 우주의 본질은 정보로써 기술할 수 있다는 정보물리학자들의 생각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다.

비트에서 존재로(it from bit)?, 세상 사물은 모두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유명한 물리학자 파인만의 스승인 물리학자 휠러(John A. Wheeler, 1911~2008)는 2002년 국제 학회에서 물리학과 철학의 경계에 있는 다섯 가지 큰 질문을 던졌다. (1) 존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2) 왜 양자인가? (3) 동참하는 우주? (4) 의미는 무엇인가? (5) 비트에서 존재로(it from bit)? 이 다섯은 서로 연결된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비트에서 존재로?’만을 중점적으로 고려하고 ‘업’의 의미를 정보로 해석할 것이다. ‘it from bit?’에서 ‘it’은 ‘물리적 존재’, ‘bit’는 정보의 단위로서 여기서는 그냥 ‘정보’를 뜻한다. 따라서 ‘it from bit?’는 세상 사물은 모두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다. 정보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세상 만물의 기본은 정보로서 정보는 모든 존재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모든 힘의 장, 즉 약력, 강력, 전자기장과 중력장도 정보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장이 곧 시공간이므로, 힘의 장이 정보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은 시공간 자체도 정보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이다. 정보물리학에서는 결국 우주가 정보로 이루어졌고 우주는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한다. 정보가 세상을 만드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연구한 바에 의하면 정보는 물리적이다. 그리고 정보는 어떤 것을 의미해야 한다. 따라서 정보는 물질과 정신의 연결점이다.

과학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감각기관에 들어온 정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이 원인이 되는 ‘다른 것’으로부터 정보를 주고받아 처리해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리계와 앎(cognition)과 관련이 있는 마음이나 두뇌와 같은 인지 시스템(cognitive system)은 모두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도 태양에서 오는 정보를 지구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맞게 처리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다.

업은 ‘저장된 정보와 그 처리 과정 및 나타난 결과’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모두 정보와 정보처리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업’도 정보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행한 일체의 사건은 정보로서 마음이라는 정보처리 시스템에 저장되고 마음은 이 정보를 처리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 유식 불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인간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저지른 행동은 장차 결과를 나타내는 종자(種子, bīja)로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종자라고 부르는 것은 식물의 종자가 싹이 트는 것처럼 언젠가 업의 인과적 결과가 싹이 튼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정보와 업의 의미를 비교해 업을 과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저장된 정보와 그 처리 과정 및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양자역학의 관찰자 문제이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관찰 전의 물리적 대상은 실체가 없는 확률파에 불과하고 관찰자가 관찰을 할 때 확률파가 붕괴되고 그때 비로소 입자라는 실체가 나타난다. 이것은 물리적 실재란 관찰 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찰에 의해 비로소 물리적 실재가 만들어진다는 것으로 미시 세계의 대상은 우리가 질문하는 방식에 따라 실재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질문을 달리하면 대답이 달라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관찰자가 의식을 가진 존재라야 하는가 아니면 측정 기구도 훌륭한 관찰자여야 하는가 하는 것인데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이 끝나지 않은 문제이다.

유전자 스위치 역할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말과 행동, 즉 업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아뢰야식이 상분[相分, 인식 대상]과 견분[見分, 인식 주체]으로 나뉘어 삼라만상이 전개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it from bit’와 아주 유사한 견해다. 만일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자가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중생의 공업에 의해 중생이 함께 사는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유식사상의 관점은 물리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큰 틀에서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업을 별업과 공업으로 나누었는데, 공업에 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별업 중에서 개인에게 국한된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뇌/신경과학과 후성유전학 및 심리학으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어떤 상황에 부딪혀 무심코 ‘짜증 나’라고 말하면 우리의 두뇌는 중립적이기 때문에 들은 대로 반응한다. 두뇌 신경은 몸 상태를 살펴보고 몸이 짜증이 나도록 스트레스 물질을 뿌린다. 그러면 실제로 마음속으로 짜증을 느끼게 된다. 짜증 나는 마음으로 잘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지만, 똑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그 결과가 크게 다르다는 연구 결과는 뇌/신경과학과 심리학 연구에서 많이 보고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연구에서 후성유전학도 빼놓을 수 없다.

생명체의 행동은 분명히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가 같더라도 그 유전자가 발현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생명체의 행동은 다르게 나타난다. 즉 유전자를 발현시키거나 발현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유전자 스위치의 역할이 유전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전자 스위치의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말과 행동이다. 즉 업이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학자들은 ‘인간이 유전자를 조종할 수 있다’거나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

앞서 업이 세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고 했는데 별업 중에서 개인에게 국한된 것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업의 작용이 개인을 넘어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을 때에는 별업일지라도 그 효과를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별업의 경우,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란 인간의 운명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 불교의 업사상이 말하는 것은, 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라고 해서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과보가 있고,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역사를 보면 악한 사람이 잘되고 착하고 어진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BCE. 145~86경)이 『사기(史記)』에서 ‘세상에 천도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고 외쳤던 것이다. 불교의 업사상은 사마천의 외침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그리고 불교가 준 답에 대해 과학은 무엇이라고 판단할 것인가? 업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의 윤리가 이론적으로 완성되려면 꼭 윤회사상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저지른 행동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없다면 그런 윤리를 사람이 따라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불경 곳곳에는 지은 업은 금생에 받을 때도 있고 내생에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윤회가 있음으로 인해 인과응보가 성립하고 불교 윤리가 이론적으로 완성될 수 있지만 문제는 윤회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거나 확인할 길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윤회의 진실 여부를 과학적으로 논할 수는 없고 사이비 과학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던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이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겠다. “윤회는 비록 여전히 의문스럽지만, 최소한 약간의 실험을 통해 지지되고 있다.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p.345)

김성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에서 박사 학위(Ph.D, 소립자 물리학 이론)를 받았다.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고, 퇴직한 후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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