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에서 나온 임금
서울 진관사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진관사 대웅전 |
간난신고 끝에 왕이 된 현종과 진관대사와의 인연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津寬)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로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제5대 임금 경종이 죽자 자매 왕비였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20대의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뛰어난 미모와 정결한 성품으로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헌정왕후는 개경 왕륜사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관음기도를 하면서 허허로운 마음을 달랬다. 그러길 1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헌정왕후는 불현듯 자신의 분신인 아들이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이 무슨 망상인가. 아니야, 양자라도 하나 들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던 어느 날 밤, 헌정왕후는 송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데 온 장안이 소변으로 인해 홍수가 지는 꿈을 꾸었다. 하도 기이한 꿈이라 복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왕비의 말을 다 들은 복술가는 얼른 일어나 아홉 번 절을 하더니 말했다.
“아주 길몽입니다. 아기를 낳으면 나라를 다스릴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나는 홀로 사는 몸인데, 그 무슨 망발인가?”
“아니옵니다. 이는 천지신명의 뜻이오니 훌륭한 아드님을 낳을 조짐입니다.”
“이보게, 그런 말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말게.”
그 무렵, 경종의 숙부이자 헌정왕후의 숙부인(당시 왕실의 친족혼 풍습) 안종은 집 가까이 절에서 홀로 지내는 헌정왕후에게 선물을 보내거나 집으로 초대해 위로하곤 했다. 숙부의 호의에 헌정왕후도 손수 수놓은 비단 병풍을 답례 선물로 보냈다. 이러는 동안 두 사람은 정을 나누게 되었고 헌정왕후는 홀몸이 아니었다. 헌정왕후는 걱정 끝에 안종을 찾아가 송악산에서 소변 보던 꿈과 아기를 가질 무렵 관세음보살께서 맑은 구슬[明珠]을 주시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멀리 섬으로 도망가 아기를 낳겠다고 말했다.
“내 어찌 왕후를 멀리 보내고 살 수 있겠소. 더더욱 아기는 어떻게 하고 말이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안종의 부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괘씸히 여겨 안종의 방 앞에 섶나무를 쌓고 불을 질렀다. 이 사실을 안 성종(헌정·헌애왕후의 친오빠)은 안종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실신해 가마에 실려 오다 산기가 있어 그날 밤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후일의 대량원군으로, 제8대 현종이다. 헌정왕후는 아기를 분만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편 별궁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헌애왕후는 간교하기로 소문난 외사촌 김치양과 간통을 했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헌애왕후는 정사를 돌보면서 천추전에 거처해 ‘천추태후’라 불렸다. 태후는 김치양의 아이를 낳고는 장차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왕욱(안종)의 자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량원군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태후에게 대량원군은 후사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결국 김치양과 모의해 대량원군을 궁중에서 내쫓기로 했다. 이때 대량원군 나이 12세, 궁중을 떠나 개경 남쪽에 있는 숭교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입산, 출가했다.
대량군 스님이 영특해 10년 공부를 3년에 마쳤다는 소문이 나돌자 태후는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혜로운 스님의 경계로 여러 차례 화를 면한 대량군은 그곳을 떠나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의 진관대사는 대량군이 읊은 시 한 수를 듣는 순간 그가 용상에 오를 큰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대량군이 삼각산 암자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태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다. 그러자 진관대사는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 그 안에 대량군이 숨어 지내도록 했다. 하루는 나인을 시켜 독약이든 술과 떡을 보내어 대량군에게 먹이려 했는데, 어느 스님이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나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이처럼 대량군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대량군이 3년간의 땅굴 생활을 하는 동안 조정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왕은 궁중이 혼란스러운 탓에 심장병에 걸렸고, 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역적을 모의했다. 그러나 강조가 먼저 변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새 임금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대량군 나이 18세 되던 어느 날이었다.
“새 임금 맞이하니 신천지가 열리고 새날이 밝아오네.”
풍악 소리가 울리면서 오색 깃발이 하늘을 뒤덮은 가운데 금·은·칠보로 장식된 8인교 가마가 산문 밖에 멈췄다. 스님들은 정중하게 행차를 맞이했다.
특명 대사 김응인과 황보유의는 진관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찾아온 뜻을 말한 후 국궁 재배했다. “대군마마! 대위를 이으시라는 어명을 받잡고 모시러 왔사옵니다.”
“내 운명이 기구해서 세상을 등진 몸, 일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니 어서들 물러가시오.”
하지만 대량군은 거듭 간청하는 특사의 뜻과 진관대사의 권유에 못 이겨 땅굴에서 나와 대궐로 향했다. 대량군은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라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했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