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업과 힌두교의 업, 무엇이 다른가|업(業)은 숙명이 아니다

불교의 업과
힌두교의 업, 무엇이 다른가

심재관
상지대학교 FIND칼리지학부 교수


힌두교도 업과 윤회 받아들이나
철학적 성찰 깊이 있게 만들어줄 교리적 전제 없어
고대 인도 세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사상적 주도권 또는 이에 대한 논쟁적 발전은 실질적으로 대부분 불교와 자이나교가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에서 업과 윤회와 관련된 불확실하고 단편적 사유들이 등장한 이후로, 업과 윤회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논의는 고전적인 힌두 철학 자체 내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의 사라졌다기보다는 불교와 비교해서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궁핍한 논리적 전개가 있을 뿐이다. 윤회와 업에 대해 불교가 비교적 깊이 있는 사상적 진보를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무아와 윤회를 동시에 설명해야 하는 불교만의 영원한 난제(難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불교에서는 무아를 가르치는데, 이생과 전생을 이어가는 업과 윤회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불교와 같이 힌두교도 업과 윤회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윤회의 주체에 대한 설명을 단순히 뿌루샤나 아트만, 또는 미세신(微細身) 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해버리면 될 일이기 때문에, 철학적 성찰을 깊이 있게 만들어줄 교리적 전제들이 없었던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윤회의 주체 문제뿐 아니라 업과 윤회의 관계도 원인과 결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인과에 대한 문제도 발전시켜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과의 문제는 어떤 행위의 주체들이 특정한 시간 속에서 발생시킨 사건이기 때문에, 그 행위의 주체가 계속 동일한 행위자의 정체성을 갖는지, 또한 찰나적인 시간 속에서 원인과 결과는 실제로 유효한 것이 되는지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을 낳았다. 이러한 결과들로 말미암아 꽤나 정교한 불교 논리학이 탄생하게 된다.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 쁘라갸까라굽따 같은 불교 철학자들이 등장했고, 이들에 의해 업과 윤회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매우 정교한 철학적 기반이 계속 다듬어졌다.

이에 반해 힌두교는 업에 관한 이론적 기반을 정교하게 발전시키지 않았다. 우파니샤드에서 업(karman)은 대체로 베다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러한 의례적 행위를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에 따라 생사윤회를 반복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초기 우파니샤드, 브리핫아란냐카 우파니샤드나 찬도갸 우파니샤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미 불교 이전에 어떤 선악의 행위에 의해서 다음 생애에 그 결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유포되고 있었으나, 그다지 대중적인 이념은 아니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업에 대한 관념은 샹캬 철학과 요가에서 조금 더 진전시키고 있지만 ‘실체의 직관’을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인해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들의 의미는 그다지 부각되지 못했다.

「마하바라따」, 「라마야나」 같은 힌두교 문학이 업과 윤회의 논의 이끌어
흥미롭게도 우파니샤드 이후에 업과 윤회의 논의를 이끌고가는 것은 고전 철학 텍스트가 아니라 힌두교 문학이었다. 이 논의의 바통을 거머쥐게 된 것은 바로 고전기와 후기 중세에 이르기까지 고대 인도인들의 윤리적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두 서사시, 「마하바라따」와 「라마야나」이다. 이 문학이 고대 인도에서 중요한 이유는 힌두교의 철학과 종교적 사상을 매우 드라마틱한 예화(例話)를 통해 대중화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업과 윤회의 문제를 조금 다루고 있었던 힌두 철학들, 즉 초기 샹캬 철학이나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의 주제도 적절히 섞어서 설명한다.

따라서 이 문학들을 읽어내려가면 고대 힌두 대중들이 업과 윤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더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문헌 속에서 불교의 업사상과 큰 차이가 보인다고 생각되는 고대 힌두인들의 업사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고대 힌두인들이 찬미한 업 가운데 지고한 업은 이욕적(離欲的) 업이다. 즉 사사로운 개인의 욕구에 의해서 빚어진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배제한 채로 행위하는 일이다. 이를 이욕행(niṣkāma karma)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것을 수행도(yogamārga)라고도 표현한다. 이 이욕행이 얼핏 불교와 유사하다고 생각되겠지만, 꽤 다른 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욕행은 개인의 사욕을 떠나서 행위하되, 다만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 행위하되 자기 본연의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 결과를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 최종적인 결과와 의미도 염두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 행위의 결과에 대한 판단과 의미는 최종적으로 신적인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 결과가 모두에게 비극이나 불행이 될지라도 그 의미는 초월적 존재만이 이해할 수 있거나 또는 초월적 존재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정당성 문제(theodicy)에 더 가깝다.

이 관점을 예로써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바가바드기타』인데, 여기서 주인공 아르쥬나와 크리슈나가 사촌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나누는 대화의 핵심이 바로 이욕행에 관한 것이다. 신의 분신인 크리슈나는 마부로 변장해 사촌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아르쥬나에게 이 이욕행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이욕행을 설득하기 위해 샹캬 철학과 베단타 철학으로 무장한 형이상학을 아르쥬나에게 설파한다. 살육이 일어나기 직전 전쟁터에서 말이다.

둘째, 이 『바가바드기타』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힌두교의 업은 불교와 같은 보편적 선(善)을 지향한다기보다 힌두교에서 설정한 특수한 선(善)을 이끌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힌두교에서 설정한 다르마(dharma)로서의 직업적 윤리(군인으로서의 의미)가 인간 보편의 선(죽이지 않음)을 압도함으로써, 계급 질서의 유지를 위한 힌두 사회의 특수한 윤리 규범을 옹호하게 된다는 점이다. 직업의 특수 윤리가 본체론적인 힌두교의 형이상학에 의해 인간 보편 윤리를 뛰어넘게 될 때, 여기서 도덕률폐기론(Anitinomianism)을 만나게 될 수 있다.

셋째, 힌두교의 업에 대한 관념이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 고전 시대의 문학을 통해서 나타나는 힌두교 내의 업사상은 매우 특이하게도, 현생의 업이 내세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연결하는 대신 많은 경우 현생의 업이 곧장 현생에서 업보로 나타나는 어떤 사건으로 묘사하는 것이 매우 두드러진다. 고대 힌두인들은 업과 윤회를 아주 먼 전생으로부터 끌어다 쓰기보다는 현생의 어떤 원인과 결과로 파악하기를 원한다. 그 사건의 원인조차도 이 세상을 떠난 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얼마 전 또는 몇 십 년 전 친숙한 공간 어디에서 내가 저질렀던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비교해볼 때, 힌두교에서 생각하는 업과 그 업보가 나타나는 시간의 폭은 때때로 이렇듯 매우 좁게 표현된다.

예를 들어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다샤라타 왕은 아들 라마를 잃게 된 상황에서 깊이 상심하게 되고 병을 얻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서야 자신의 현재 처지가 과거 자신이 저지른 업에 의한 것임을 상기한다. 다샤라타 왕은 사냥에서 타인의 아들을 실수로 살해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로 그는 사전에 자신의 죽음이 “그렇게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즉 자신의 현생의 어떤 행위가 현생의 어느 시점에 다시 업보로 다시 되돌아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힌두 문학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마하바라따」의 또 다른 주인공 카르나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가 호적수 아르쥬나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순간에 그의 마차 바퀴는 갑자기 진흙 속에 박혀버린다. 그 기회를 아르쥬나가 놓치지 않고 그를 죽인다. 카르나의 마차 바퀴가 갑자기 진흙에 박히게 된 원인은 그의 전생의 업 때문이 아니라, 그가 현생에 그의 스승을 속였던 과보로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불교의 업보도 현생현시(現生現時)에 원인과 결과가 다 존재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이 네 번째의 차이점이다.

넷째, 이 지점에서 힌두교 대중들이 바라보는 업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모하게 된다. 즉 이제 업은(특히나 매우 결정적인 어떤 행위는),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숙명적인 어떤 것으로 변화한다.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해보아야 할 것은 “저주”라는 고대 힌두 세계에서 매우 일상화되어 있는, 업과 관련되어 있는 심리적 장치다. 현재 자기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은 과거의 어떤 일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한데, 그 과거의 업이 먼 세세전생의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몇 년 전, 혹은 몇 십 년 전의 자기 행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업은 타인의 저주가 얹혀지면서 완전한 숙명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다샤라타는 실수로 맹인의 아들을 죽였으나 단순히 그 업 때문이 아니라 맹인의 저주로 인해서 죽었던 것이고, 까르나는 스승을 속이고 교육을 받았던 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승의 저주를 받아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저주라는 필연적 과보의 장치가 더해지면서 힌두 대중들이 체감했던 업 관념은 점점 더 피해갈 수 없는 숙명 같은 어떤 것으로 변모하게 된다.

심재관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서울대 강사 등을 거쳐 현재는 상지대 FIND칼리지학부 교수로 있다. 힌두교의 의례, 신화 등을 비롯해 필사본 연구와 건축과 조각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