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새날 속에서|이호신 화가의 지리산 생태 그림 순례

언제나 새날 속에서

이호신 화가

지리산 천왕봉 해돋이, 137X199cm

밤새 눈이 내렸다.

모처럼 텃밭과 마당, 지붕의 기왓골에도 백설이 선연하다.

이 해맑은 풍광을 바라보는 순간은 새 아침이요, 서설(瑞雪)이다. 새삼스레 오늘의 축복에 감사한다. 이 숫눈길 속에서 창공을 바라보며 ‘최초의 생각’과 ‘또 다른 새로움’을 떠올린다.

한편 지난 초겨울 지리산 법계사 밤의 달빛에 취한 후 어둠을 뚫고 천왕봉에 올라 해돋이의 장관을 만끽했다. 산 파도에 잠긴 세상은 천지의 경계를 허물고 새날의 빛으로 나투었다.
지리산 천왕봉의 겨울밤, 180x543cm

어느덧 지리산 산골로 귀촌한 지 15년째, 나는 작가로서 ‘예술은 무리 짓지 않고 홀로 피우는 영혼의 꽃’이라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 시간은 다짐과 성찰의 나날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서 지리산 하늘 아래에서 만난 인연은 모두 은혜의 숨결이요, 내 붓길의 흔적이요, 생활의 무늬가 되고 있다. 뭇 생명과 조우하며 상생과 공존의 뜻을 헤아리게 한다.

그중 한겨울 천왕봉과 산맥이 겹겹한 설산을 마주할 때의 장엄은 몹시 서늘하다. 특히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시간은 우주와의 만남이다. 그 은하를 바라보며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김환기가 그린 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나의 별을 생각했다.

그 대지 아래에서 만난 숱한 소나무와 구상나무들, 함께 눈을 맞던 서어나무는 어느 해 생명을 다해 아득한 기억과 그림으로만 남았다. 또 지리산 둘레길로 허위허위 헤매며 찾아간 함양 벽송사의 ‘벽송(碧松)’은 마치 우주의 기둥을 연상케 했다. 누구든 이 벽송에 기대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라!

이렇듯 은백색으로 변하는 설경은 혼탁한 세상을 덮어주는 풍광으로 좋아해 화첩을 챙겨 산사로 떠나는 여정이 지속 중이다. 눈길에서 지난 나의 발자국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 빈 침묵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해 모든 근원에 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언제나 새날 속에서.

이호신
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6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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