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의 업사상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교수
의도가 업이다
업사상은 윤회사상과 함께 불교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고, 불교 및 자이나교와 같은 신흥 사문사상이 각각 새로운 입장에서 업과 윤회사상을 주장했다. 본고에서는 초기 불교의 업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불교 문헌에 의거할 때 업에 의한 인과응보 사상과 오온의 상속으로서의 무아 윤회사상은 초기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불교의 업(業, skt: karma, pāli: kamma)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초기 경전에 의하면 업(業)이란 의도(思, cetanā)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cetanā, 思]가 업[kamma, 業]이라고 말한다. 의도한 후, 사람들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 지옥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업이 있고, 축생계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으며, 아귀 세계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고, 인간계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으며, 천상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다. (…) 업의 결과[果報]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현세에서 받는 것, 바로 다음 생에서 받는 것, 미래 생에서 받는 것이 그 세 가지이다.(AN6:63)
이 경전에서는 의도한 후(cetayitvā) 몸, 말,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kammaṃ karoti). 또는 행위를 한다고 했으므로, 의도로서의 업에 근거해, 몸, 말,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즉 행위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생은 자신의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
『숫타니파타』에 의하면 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업[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업에 의해서 바라문도 된다고 한다.(Sn v.136, 142) 또한 인간에게는 출생에 기인한 다양한 특징이 없고, 인간 가운데 있는 다양한 구별은 단지 명칭뿐이라고 하면서, 행위에 의해서 사람들을 농부, 기술자, 상인, 고용인, 도둑, 전사, 제관, 왕으로 구별할 뿐이라고 하며 붓다는 출생과 가계 때문에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Sn v.607, vv.611~620.)
어떤 존재이든 자신의 의도에 의해 지은 업은 그 결과를 스스로 받게 되어 있다. 즉 중생은 자신의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숫타니파타』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한다. 중생들은 업에 묶여 있다. 마치 달리는 마차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Sn v.654)
또한 모든 중생들은 업을 자기 것으로 하고 업의 상속자이자 업을 의지처로 삼는다.
비구들이여, 모든 중생들은 업(業)을 자기 것으로 하며,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며, 업을 친족으로 하고, 업을 의지처로 한다. 선한 업이든지 악한 업이든지 그 어떤 업이라 하더라도 그 업의 상속자가 된다.(AN 10:206)
중생은 업에 의해 윤회한다
업은 그 업을 지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에서 결실을 맺으며, 그 업의 결과를 맛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업의 결과를 맛보는 시기는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중생은 업에 의해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업은 탐진치라는 번뇌에 의해서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탐욕[貪]에서 비롯된 업, 탐욕에서, 성냄[瞋]에서, 어리석음[痴]에서 비롯된 업,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업,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든지, 다음 생[來生]이든지, 아주 먼 후생이든지 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AN 3:33)
이 구절 다음에는 탐욕 없음, 분노 없음, 어리석음 없음이라는 세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 업에 의해 윤회의 근거가 단절되었음을 설명한다. 이처럼 여섯 가지 원인(nidāna)을 통해 윤회의 근거(탐진치)와 열반의 근거(무탐, 무진, 무치)를 밝히고 있다.
이 세상에 원인이나 조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인데, 이 연기설은 언뜻 보기에는 타고나면서부터 불공평한 것들의 원인을 설명해주고 있다.(MN135) 그리고 우리들의 잠재적인 성향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운명, 모든 행복과 불행이, 부분적으로는 이 생에서 또 다른 부분은 지난 생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원인에서 생겨난 것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원인들은 몸과 입과 마음에서 생겨난 행위[業]이다. 탐진치와 결합되어 있거나, 그 결합되어 있지 않은 이 행위[業]가 모든 존재의 성향과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업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면, 윤회와 연결되어 있는, 선악의 의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업을 생각할 때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존재의 무아(無我)적 특성이다. 생사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은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행위에 따라서, 이 생에서는 인간으로, 저 생에서는 짐승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단순한 생명의 파도일 뿐이다. 여기서 ‘업’이라고 하는 용어는 오직 앞에서 언급했던 세 가지 행위의 종류만을 의미하지, 그 결과를 의미하거나 그 결과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붓다의 말씀』 냐나틸로카 저,김재성 역, 고요한소리, p.66)
업은 윤회전생과 결합되며 지은 업에 적절한 세계에 존재 받게 돼
업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있기 때문에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업은 들판이며, 식(識)은 씨앗, 갈애는 수분의 역할을 하면서 존재 세계에서 윤회전생하게 된다.
세존이시여, 존재, 존재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됩니까?
아난다여, 욕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식(識)은 씨앗이며,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저열한 [욕]계에 식을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런 것이 존재이다.(AN3:73)
이와 같이 업은 윤회전생과 결합되어 있으며, 지은 업에 적절한 세계에 존재를 받게 되는 것임을 초기 불교는 분명히 하고 있다.
팔정도를 세간의 팔정도와 출세간의 팔정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경전에서 세간의 바른 견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남아 있어(sāsavā),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세간의] 바른 견해는 어떠한 것인가? 보시는 있다. 제사도 있다. 공양을 베푸는 것도 있다. 선행과 악행 둘 다 과보가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즉시 태어나는[化生] 중생도 있다.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와 성직자가 있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설명할 수 있다는 [견해가] 번뇌가 남아 있어,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세간의] 바른 견해라고 한다.(MN 117)
이 경전에서는 업에 의한 과보와 윤회전생은 이처럼 올바른 수행자가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업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N4:77)라고 했다. 이는 네 가지 불가사의(cattāri acinteyāni)의 하나로, 붓다와 삼명, 육신통을 얻은 아라한만이 업의 과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업은 숙명이 아니며 노력에 의해 개선해나갈 수 있어
팔리 『니까야』와 한역 『아함경』 등의 초기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자신을 업론자(kamma-vādī)이며 행위론자(kiriya-vādī)라고 했다. 즉 업을 설하는 자, 행위를 설하는 자라는 의미다.
실로 사문 고타마는 업론자이고, 행위론자이며, 바라문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고 있다.(DN I, 115)
불교의 업을 숙명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의 업은 어쩔 수 없지만, 현재의 업은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에 의해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업에 대한 이해다. 업론은 연기(緣起) 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현자들은 업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들이고, 연기를 보는 자이고 업과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Sn v. 653)
초기 불교에서는 보시, 지계 등의 선업을 쌓아 현재와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업의 길과 37보리분법을 닦아 열반을 얻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결코 이질적인 두 길이 아닌, 같은 길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불교의 업사상에 근거한 신앙과 실천은 선업에 의한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되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재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도쿄대 대학원 인도철학불교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능인대학원대 명상심리학과 교수, 자애통찰명상원 대표로 있다. 초기 불교 및 부파불교 수행론 전공, 불교심리학과 명상 연구, 실천, 지도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의 이해』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붓다의 말씀』, 『위빠사나 수행』, 『마음챙김과 심리치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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