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菩提心)
참다운 수행자의 정신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불교는 스스로 내면의 잠재력을 계발하는 수행의 종교
절에 가면 불교도들이 불상(佛像)에 수없이 절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불교를 믿지 않는 친구가 물은 적이 있다. 법당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이 친구가 한다는 말이 그것이 숭배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거다. 물끄러미 그 친구를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불상에 절하는 불자들은 지금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게 아니라 보리심을 키우고 있는 거라고.
세계의 여러 종교 중에서 신도의 숫자로 보면,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다음으로 큰 종교이다. 그리고 ‘신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라는 기준으로 보면, 5대 종교 중에서 불교가 유일하게 신을 믿지 않는 종교다. 종교 세계지도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100명의 사람 중에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 그리고 힌두교도가 70명에 달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16명, 나머지 중에서 7명만이 불교를 믿는다. 달리 말하면, 세상 사람 100명 중에 단지 7명 정도가 자기 수행의 목적으로 종교를 믿는다. 아마 불교인 중에서도 악한 기운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거나 행운과 번영을 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세계 인구의 몇 퍼센트 되지 않는 소수의 사람만이 자기 수행에 관심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신적인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수행만을 추구하는 종교 행위는 어렵고 드물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이 택하는 자기 수행의 방법은 보리심을 키우는 것이다.
불교는 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는 종교다. 붓다(Buddha)는 우리에게 자제와 도덕성의 함양을 시작으로 지혜와 자비를 기르는 정신적 계발의 길을 가르치셨다. 붓다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붓다의 제자는 그 길 위에서 각자 의지와 자성(自省)의 힘을 키우고 지혜를 통해 마음에 관한 이해를 넓혀나가야 한다. 이처럼 불교는 신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의 잠재력을 계발하는 수행의 종교이다.
절에 가면 불상(佛像)에 수없이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이 불상에 절을 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붓다로부터 부와 명예 그리고 행운과 같은 세속적인 행복을 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가장 자비로운 분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불상은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집중의 대상이다. 불교도는 붓다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새겨 항상 기억하고,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수행자의 마음에 붓다의 想(이미지)이 확립되면, 수행자는 그 이미지로부터 올바른 행동과 생각의 길을 따르도록 하는 영감을 얻는다. 언제 어디서나 붓다를 떠올리면, 붓다에 대한 기억은 그 순간 기쁨을 낳고 마음에 활력을 주며, 바른 선택으로 이끌어 불안과 긴장 또는 좌절에서 구해준다. 따라서 불상에 절하고 기도하면서 불상을 바라보는 것은 숭배가 아니라 보리심을 일깨우는 명상이다.
보리심은 ‘깨달음 그 자체’로 참다운 수행자의 정신 상징
보리심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불교 특유의 말이다. 불교가 비록 인도 고대 종교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영향 아래 탄생한 종교이지만 이들의 문헌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 고유의 것인 보리심은 불교 수행자의 본성을 대표하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먼저 보리심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 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망하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동시에 보리심은 서원(誓願)으로서 경건한 약속이다. 특별한 의례를 통해 말로 약속하는 서원이 보리심이다. 그리고 보리심은 선한 행위와 번뇌 없는 행위의 원동력이 되는 선하고 번뇌 없는 마음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끝으로 보리심은 ‘깨달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 보리심은 불교 수행 과정에서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참다운 수행자의 정신을 상징한다.
수행자는 붓다가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해 세웠던 서원을 기억하고 붓다의 성품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이와 같은 억념(憶念, 일반적인 기억이 아니라 항상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리심을 유지하고 기르는 것이다. 이처럼 보리심에 대한 억념을 꾸준히 수행하면 보리심이 더욱 커지고 결국에는 깨달음으로서의 보리심을 얻게 된다.
숭배는 대부분의 종교 전통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 행위이다. 왜냐하면 숭배하는 대상이 확실하면 수행자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다른 유혹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불상을 숭배하는 것은 수련의 길이 아니다. 붓다의 제자는 붓다를 숭배하는 대신에 붓다의 정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을 지속해서 내도록 한다. 붓다의 제자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은 보리심이고, 그 마음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보리심이며, 그 마음을 유지하는 번뇌 없는 청정한 마음도 보리심이다. 사실 이러한 보리심을 계속해서 내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붓다의 제자가 보리심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수행을 지속할 수는 없다.
『화엄경』에서는 선한 일을 행할지라도 보리심(菩提心)을 소홀히 하면, 그것은 결국 삿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보리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더 일깨워주고 있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목적지를 모르고 걷고 있다면, 그 여행은 피곤하고 쓸모없는 것이 된다. 만일 내가 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불의 목적, 즉 마음과 성품을 이해하고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목적을 잊어버린다면, 나의 모든 노력은 단지 인간계의 공덕, 즉 세간 이익을 가져올 뿐이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보면, 결국 나는 여전히 미혹에 빠져 생사의 윤회 속에서 맴돌며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세웠던 서원과 붓다의 성품을 억념하는 것, 즉 보리심이 불교도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보리심은 단계별로 배양되고 확장된다고 가르쳐
대승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보리심은 단계별로 배양되고 확장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부처가 되어 무수한 중생의 해탈을 돕는 것을 발원한다. 이때 불자의 마음에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열망으로서의 보리심이 커진다. 이 단계에서는 보리심(菩提心)을 얻는 것이 필요하지만, 보리심은 아직 충분히 계발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의 보리심은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생명이 윤회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불자들이 법회마다 외는 4홍서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중생의 수가 한없이 많지만, 모두를 교화해 생사 해탈의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고, 다함이 없는 번뇌를 반드시 끊어서 생사를 벗어나며, 한량없는 법문을 남김없이 배워 마치고, 마침내 위없는 최상의 불도를 이루겠다는 맹세이다.
나는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기로 맹세하고/나는 모든 중생의 끝없는 고난을 끝내겠다고 맹세합니다./나는 무한한 법문을 통달할 것을 맹세하며,/나는 위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이루기를 발원합니다.
그다음으로 진정한 보리심을 계발하기 위해 수련을 해야 한다. 수련 과정에서 서원 정신을 명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집착, 분노, 기타 괴로움을 극복하고 깨어남을 위해 노력하기 위해 많은 수행과 명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꾸준한 수행을 통해 “보리심의 각성”이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처음으로 마음의 궁극적인 성품을 직접적으로 깨닫기 때문에 실제로 보리심을 맛보는 단계이다. 이는 순수한 마음, 즉 실제 보리심을 깨달을 때 발생한다. 즉 수행자는 자신의 보리심을 깊이 이해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 순수한 마음이 비어 있음(空)을 깨닫는다.
여기서 ‘보리심’이란 자신의 불성(佛性)을 깨달으려는 열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불교에서 구도자가 깨쳤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적어도 이 세 번째 경지를 달성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모든 모호함이 영원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이러한 보리심을 맛보고 나면, 수행자는 이제 완전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살 수행을 계속해서 수행한다. 그것은 마치 초승달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단계에는 영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육바라밀을 완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보살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다.
불교 수행 과정에서 보리심은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참다운 수행자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보리심은 종자와 같고 밭과 같으며, 물과 바람과 불과 같으며, 해와 등불과 보름달 같다. 또한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다. 바다와 같고 연꽃과 같다’고 말한다. 붓다의 제자들에게는 붓다를 기억하면서 붓다의 정신과 성품을 일깨우는 행위가 바로 보리심이다. 그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불상에 절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문진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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