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부처님의 무여열반과 그 이후

황순일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부처님께서는 유여열반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죽음과 함께 무여열반에 도달하시게 되는데, 그 후에 과연 어떻게 되셨을까? 오래전부터 부처님의 사후 상태를 밝히고 해명하려는 시도들이 무수히 있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설명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기본적으로 여래의 사후 상태에 관한 명확한 해답이 초기 경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그와 같이 떠나갈 사람’이란 의미 의 ‘Tathāgata’로 즐겨 칭하셨다. 이때 ‘그와 같이’를 의미하는 ‘tathā’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지칭하는 부사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부처님께서도 무여열반을 통해 이 세계를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남겨놓으려고 했던 듯하다. 

초기 경전에는 부처님의 사후 상태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실상 부처님의 사후에 대한 질문은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14가지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 중의 하나로서 우리는 여래가 사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또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라고 직접적 으로 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급 자체가 유여열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 죽음과 함께 무여열반에 들어 도달하는 상태를 이미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 긍정하든, 부정하든, 긍정 부정을 다 하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든 간에,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직접 지각에 의해 알려지지도 않고 추론을 통해 파악되지도 않는 어떤 초월적인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비록 초기 경전에서 부처님의 사후 상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보기는 어 렵지만, 불의 소멸이란 열반의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이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추정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열반으로 음사되는 니르바나(nirvāṇa)는 ‘불이 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용어는 타동사로도 자동사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전자라면 불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꺼지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라면 불이 더 이상의 연료가 없어서 자동으로 꺼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실상 초기 경전에서는 부처님 의 마지막 상태와 관련해 양자 모두가 나타나고 있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 1074 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빠시와(Upasīva)의 질문에 불의 소멸에 대한 타동사적 이미 지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마치 불꽃이 바람의 힘에 의해 흔들려 꺼지게 되면 더 이상 불꽃으로 헤아릴 수 없듯이, 성인이 자신의 정신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워져서 소멸하게 되면 더 이상 성인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 게송은 불의 소멸을 타동사적인 의미로 보는 것으로서 고대 인도인들은 이를 현 상적인 불이 잠재적인 불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잠재적인 불은 언제든지 부싯 돌을 통해 마찰열이 가해졌을 때 다시 켜져서 현상적인 불로 되돌아올 수 있다. 비록 불이 우리들의 눈앞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사실상 이 불은 그 기원이나 원천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간주된다. 불이 현상의 배후에 있는 기원이나 원천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부처님의 사후 또는 근원 또는 절대와 같은 것과 합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열반 이후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된다.

한편 『맛지마니까야(Majjhimanikāya)』의 앗기왓차곳따숫따(Aggivacchagottasutta)에서 부 처님께서는 불의 소멸에 대한 자동사적 이미지를 이용해 왓차곳따(Vacchagotta)를 설 득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 사후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반격하신다.
 
“왓차여, 네 앞에 있는 불이 꺼졌다면, ‘내 앞의 불이 꺼졌구나’라고 알아차릴 수 있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왓차여, ‘네 앞에서 꺼진 불이 동서남북 어디로 갔느냐’라고 물으면 어 떻게 답하겠느냐?”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목초와 마른 가지를 연료로 불이 타오릅니다. 이들을 다 사용하고 더 이상의 연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연료가 없어서 불이 꺼졌다’라고 말 할 뿐입니다.”
“그렇다, 왓차여. 여래임을 알 수 있는 여래의 신체는 ‘뿌리째 뽑혀 뿌리가 잘려나 간 야자 열매처럼, 포기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미래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만 한다.”
 
더 이상의 연료가 남지 않아서 꺼지는 불은 모닥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닥불은 더 이상의 연료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자동으로 꺼지게 된다. 이렇게 꺼진 불은 부싯돌로 마찰열을 가한다고 해도 결코 다시 켜질 수 없다. 마치 이러한 불의 소멸이 완전하고 최종적인 소멸이듯이 열반 이후는 근원 또는 절대와 같은 것과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절멸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왓차곳따와의 대화는 ‘뿌리째 뽑혀 뿌리가 잘려나간 야자 열매’의 비유를 통해서 열반 이후의 불가역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즉 유여열반을 통해 더 이상의 집 착과 번뇌가 남지 않은 성인이 죽음과 함께 무여열반에 들게 되면, 그를 끊임없이 윤 회하는 세계로 되돌아오게 하는 연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그는 더 이상 윤회하 는 세계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더 이상 윤회하는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로 근원 또는 절대와 같은 것과 합일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ātman)를 현상적인 불의 배후에 근원적이 며 순수하고 보이지 않는 상태의 불로 보는 우빠니샤드(Upaniṣd)의 견해라고 할 수 있 다. 따라서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불의 소멸에는 자동사적 측면이 강하며 이는 그 이 후의 존재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열반 이후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으로 보려는 태도는 부처 님의 사후, 불교는 출가 수행자들을 중심으로 승단을 형성하고 점차적으로 크고 다양 한 조직을 갖춘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불교 교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에도 뛰어 들게 된다. 이들에 의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체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아비달마의 교학이 발전하게 된다. 이때 모든 출가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수행의 최종 목표가 되는 열반이 명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져 있을 수 없었다. 부파불교 시대에 많은 논사들은 부처님에 의해서 침묵으로 남겨졌던 열반 이후의 존재론적인 상 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하려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열반은 부파불교의 주요한 18부 파들 중에서 경량부(Sautrāntikas)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파들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오직 경량부만이 열반을 있었다가 없어지는 후비존재 (paścādabhāva)로, 마치 종소리와 같다고 해 열반 이후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황순일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박사(동양학과)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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