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불연의 바탕은 미소 짓는 부처님과 구산 스님|나의 불교 이야기

내 불연의 바탕은
미소 짓는 부처님과
구산 스님

정찬주
소설가

쌍봉사 대웅전 부처님

나는 불교 산문집과 소설을 쓰는 작가
보름 전쯤이다. 한국문협 보성군지부에서 가을 문학기행 행사를 치른 적이 있다. 장소는 보성 차밭 입구에 자리한 나의 문학비가 있는 문학공원에서였다. 행사명은 ‘정찬주 작가와 함께하는 2023년 차꽃 시 - 문회(文會)’였다.

나는 인사말로 행사 취지를 살려 나의 문학적 성향과 태도를 간단하게 소개했다. 인사말 요지는 등단한 지 40여 년이 되었고, 70을 넘긴 나이까지 매년 두어 권씩 발간한 책이 100여 권 정도일 거라고 밝혔는데, 그 대부분이 불교적인 산문집과 소설이라고 이야기했다. 올해 발간한 인도의 아소카왕을 소재로 다룬 대하소설과 서른 살 즈음부터 나에게 다가온 『반야심경』을 사색한 산문집이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쌍봉사 부처님이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가에 반독재투쟁 시위가 잦을 때였다. 나의 모교 동국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탓에 장기 휴강이나 결강이 많았다. 그때 나는 치약, 칫솔 하나, 수건 한 장 든 가방을 달랑 들고 바람처럼 쌍봉사를 찾곤 했다. 더운 피가 흐르던 혈기왕성한 청년의 나이로, 이 땅을 사는 젊음이라면 누구나 내출혈이 있었던 그 시절, 나는 전남 화순군 쌍봉사를 내려갔던 것이다. 그때의 쌍봉사는 내게 일종의 피난처였다. 좀 더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스스로 자원해서 간 유배지라고나 할까. 에라, 모르겠다. 소설 습작이나 하자고 내려갔던 곳이 쌍봉사였다.

그런데 쌍봉사는 나에게 정신의 정수기가 되어주었다. 침묵이라는 투명한 맥반석이 복잡한 내 영혼을 정화시켜주었다. 당시 쌍봉사는 폐사 일보 직전인 데다 인적마저 뚝 끊겨 침묵만이 유일한 단세포 생물처럼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설 습작 대신 낙엽을 쓸고, 법당에 낀 먼지를 닦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준 당시 스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절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도 나는 스님이 출타해버리고 없어 혼자서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대웅전에 낀 먼지를 좀 더 구석구석 닦아내기로 했다. 그래서 오른 곳이 3층 목탑 형식인 대웅전의 불단이었다. 연화좌대에 오르고 보니 부처님한테도 먼지가 많이 끼어 있었다. 나는 마른걸레로 내 손금과 엇비슷한 부처님 손바닥까지 닦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전율하고 말았다. 부처님이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은 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석굴암의 자비로운 미소가 아니라,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경지였다.

이후부터 나는 불교적인 깨달음을 체험한 것처럼 불평 없이 절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경내에 진눈깨비가 흩날리건 찬 바람이 불건 상관없이 미소 짓고 있는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쌍봉사 부처님의 미소는 한동안이나마 내 욕심의 헛가지를 잘라내고 깊은 불연(佛緣)을 맺게 해주었다.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의 곡진한 말씀은 잊히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불교학생회 친구 두세 명과 송광사 서울 포교당인 법련사를 찾아갔다. 친구 중에 누군가가 송광사 구산 방장 스님께서 법련사에 와 계신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방장 스님은 20대 중반의 우리들을 특유의 천진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그런데 방장 스님께서는 무슨 연유인지 내게만 질문하셨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는데 내가 답변드리면 “그게 아니지. 깊이 생각해봐” 하시며 고개를 흔드셨다. 작은 체구의 방장 스님은 집요했다. 친견이 끝나고 나서도 법련사 현관까지 따라 나오시며 “출가해서 깨달아보게” 하고 내게 출가를 권유하셨다. 그래도 나는 방장 스님의 강권을 따를 수 없었다. 문학에 대한 꿈이 컸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구산 방장 스님의 곡진한 말씀은 잊히지 않았다. 상명사대부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있을 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월간 『불교사상』을 창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쌍봉사에 진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학교에 사표를 내고 불교사상사로 갔다. 방장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는 스님의 열반송 중에 한 구절을 빌려 ‘미소 지으며 가노라’라는 제목의 특집을 기획해서 예를 갖추었다. 이후 나는 신라의 김지장, 일제강점기의 만해, 해방 후의 경봉, 성철, 일타, 혜암, 법정 등 고승의 일대기 소설에 집중했다. 한국인의 빼어난 덕목을 고승의 행적 속에서 찾아보자는 내 나름대로의 ‘한국인 정체성 찾기’였다. 성철 스님 일대기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을 발표하자 어느 유력지 기자는 나를 소설가로 소개하지 않고 ‘불교 전문 작가’라고 했다. 처음에는 나의 문학적 영역을 좁혀버린 듯해서 저어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훈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샘터사에서 일하면서도 내 마음은 한사코 인도로 가 있었다. 『인도기행』을 발간한 불가(佛家)의 스승 법정 스님의 영향이 컸다. 마침내 나는 1995년 2월 한 달 동안 후배 소설가 구효서, 윤제림 시인과 함께 인도를 여행했다. 이후 나는 2년 터울로 인도를 열다섯 번이나 갔다. 평화와 공존, 생명 존중을 지향했던 아소까왕의 매력에 빠졌던 것이다.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의 집필 기간은 2년이었지만, 아소까 로드(Asoka Road)를 따라서 인도를 드나든 지는 30여 년이었다. 이런 작업을 작가의 숙원(宿願)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보니 50여 년 전에 구산 방장 스님께서 출가를 권유했을 때 이러한 불교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의 먼 길을 걸어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이 소설이 내 문학의 정점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종심(從心)의 나이와 상관없이 집필에는 유효기간이 없을 테니까.

정찬주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직에 종사하다가 불교사상사, 샘터사 등에 근무한 뒤 2001년에 전남 화순 쌍봉사 인근 계당산 산중에 이불재를 짓고 낙향했다. 그동안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전 7권), 『나는 조선의 선비다』(전 3권), 『아소까대왕』(전 3권),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다산의 사랑』, 『광주아리랑』(전 2권), 『보성강의 노래』 등과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전 3권), 『부처님 인생응원가』, 『불국기행』 등을 발간했다. 행원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동국문학상, 류주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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