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길을 걸어 현재의 삶에서 내일로, 일본의 불교 성지순례길

일본의 불교 성지순례길

법장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학감


종교를 넘어 공통되게 존재하는 성지순례
종교는 신앙을 통해 현실의 삶을 살아가며 내일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설한다. 여러 종교 활동이 존재하는 것도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의 모습에 맞는 수행을 찾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불교의 경우 좌선과 염불, 절을 비롯한 다양한 수행법과 신앙 활동이 있다. 이러한 신앙 활동 중에서 종교를 넘어 공통되게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성지순례이다. 이는 과거 종교의 성자들이 지낸 곳이나 수행했던 곳을 방문해 그러한 가르침을 몸소 체험하고 자신도 그러한 종교적 신앙심과 서원을 성취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 불교도 최근에는 전법의 일환으로 성지순례길이 크게 발전하고 있고, 많은 불자들이 함께 순례에 동참하고 있다. 성지순례는 그 길을 걸으며 과거 수행자의 모습에 현재를 사는 자신을 대비해 참회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추구하는 수승한 수행이다.
사진 출처_shikoku-tourism.com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 중심으로 불교가 융화된 쿠마노 옛길
성지순례길 중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스페인의 산티아고와 일본의 시코쿠 88개소 순례길이다. 이 중 일본의 시코쿠는 팬데믹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순례길이지만, 사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순례길은 ‘쿠마노 옛길(熊野古道)’이다. 이 쿠마노 옛길은 ‘기이산지의 영장과 참지도(紀伊山地の靈場と参詣道)’라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순례길의 일곱 곳 중에서 쿠마노 지역만을 따로 부르는 명칭으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순례길이다. 특히 이곳은 일본인이 죽기 전에 반드시 걸어야 하는 순례길이라고 해서, 전생의 길(선조의 길)을 걸으며 현생의 삶에서 내생으로의 다짐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거에는 쿠마노 신앙이라고도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찾았고, 현재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이라는 곳으로 신앙의 중심이 옮겨 갔지만 여전히 일본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명소이다. 일본 순례길의 특징 중 하나는 여러 개의 짧은 순례길이 모여 하나의 긴 순례길이 된다는 점이다. 쿠마노 옛길도 마찬가지로 여섯 개의 순례길로 나뉘어 있어 한 번에 모든 길을 다 걸어도 되지만 한생을 살아가며 시간이 될 때마다 찾아와 다음 순례길을 차례로 걸어 생을 마칠 때 비로소 모든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순례길을 다시금 찾게 하는 중요한 이유이며, 순례의 서원을 평생에 걸쳐 되뇌며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불교 신앙 중심으로 생겨난 시코쿠 88개소 순례길
쿠마노 옛길은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불교가 융화된 순례길로서, 순수하게 불교 신앙을 중심으로 생겨난 순례길은 그 유명한 ‘시코쿠 88개소(四國八十八箇所)’이다. 88개소 순례길은 시코쿠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순례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래는 ‘오헨로(お遍路)’와 ‘관음순례(觀音巡礼)’ 중의 하나였다. 오헨로는 시코쿠 88개소와 더불어 ‘사이고쿠 33소(西國三十三所)’, ‘사사구리시코쿠 88개소(篠栗四國八十八箇所)’의 세 종류의 순례길로 되어 있다. 관음순례는 ‘사이고쿠 33개사(西國三十三箇寺)’, 반도우 33개사(坂東三十三箇寺)‘, 지치부 34개사(秩父三十四箇寺)’의 세 종류로 되어 있고, 모든 관음순례를 마치면 ‘백관음순례(百觀音巡り)’가 되어 소원이 성취된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일본의 성지순례길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에 따른 설화와 순례의 여정이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시코쿠 88개소는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순례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앞두고 있고, 전통과 현대가 잘 조합된 순례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시코쿠 순례길은 진언종(眞言宗)의 개조인 구카이(空海) 대사가 순례한 88곳의 ‘찰소(후다쇼, 札所)’라는 영장사원(零場寺院)을 묶어서 부르는 표현이다. 제1번 료젠지(靈山寺)에서 시작해 제88번 오쿠보지(大窪寺)까지의 총 길이는 1,400km이며 걸어서 두 달여 정도가 소요되는 긴 순례길이지만, 시코쿠라는 이름과 같이 네 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어 자신의 사정에 맞게 각 지역을 나누어 걸을 수도 있다.

구카이가 착용했다는 복장을 전통 삼아 현재도 같은 복장 갖추고 길 걸어
시코쿠 순례길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처음 순례를 한 구카이가 당시 착용했다는 복장을 전통으로 삼아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복장을 갖추어 길을 걷는다. 순례 복장에는 크게 10종류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스게가사(菅笠)’라는 삿갓을 반드시 쓰고, ‘하쿠이(白衣)’이라는 백의를 입는다. 그리고 불교 수행자의 상징으로 가슴에 ‘와게사(輪袈裟)’의 오조가사를 걸치고, 그 앞에 ‘즈다부쿠로(頭陀袋)’라는 가방을 메어 순례에 필요한 최소한의 짐을 넣고 두타행을 다짐한다. 그리고 한 손에는 염주를 쥐고 다른 손에는 ‘곤고즈에(金剛杖)’라는 금강봉(지팡이)으로 땅을 짚으며 걷는다. 이 복장은 순례자의 청정함과 두타행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험난한 순례길을 걷다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다음 순례자가 자신을 백의로 감싸 땅에 묻고 그 위에 금강봉을 세워 삿갓을 올려둠으로써 순례자의 묘를 만들어달라는 순례에 대한 투철한 신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시코쿠를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러한 구도자로서의 신심을 다잡기 위해 복장을 갖추어 길을 걷고 있다.
'납경장' 수첩. 시코쿠의 88개 사찰을 순례할 때마다 이 수첩에 그 증명으로 도장 등을 받아 적는다.

‘납경장’이라는 수첩에 사찰 도장이나 순례 증명받아
그리고 시코쿠의 88개소의 사찰을 순례할 때 그 증명으로 ‘납경장(納經帳)’이라는 수첩에 사찰마다 있는 도장이나 순례 증명을 받아 적는다. 이 납경장은 자신이 일생에 걸쳐 순례길을 전부 걷고 회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자신이 죽어 화장을 할 때 함께 불에 태워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중요한 수행의 증표이다. 그리고 시코쿠 순례를 한 번이 아닌 여러 차례 걸었을 경우 ‘오사메후다(納め札)’라는 색이 입혀진 여섯 종류의 표를 받아 자신의 납경장 앞면이나 안쪽에 붙여 순례 횟수를 나타낸다. 1회 이상은 흰색, 5회 이상은 녹색, 8회 이상은 적색, 25회 이상은 은색, 50회 이상은 금색, 100회 이상은 비단으로 된 금색의 표를 지급받는다. 이는 순례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시코쿠라는 지역의 순례길을 거듭 찾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구카이가 처음 발원한 순례의 모습보다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그 횟수와 복장 등에 집착하는 모습이 생겨난 것을 지적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문화와 스토리텔링 활용해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
이처럼 일본의 순례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다양한 의미와 모습으로 발전했다. 특히 불교와 민간신앙의 융합을 통해 종교에 상관없이 순례에 동참할 수 있고, 그와 더불어 문화와 스토리텔링를 조화롭게 활용해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되어 외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종교적으로도 관음신앙과 두타행이라는 불교 수행을 일본만의 형태로 해석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선택을 통해 다양한 순례를 할 수 있는 보편성과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길에서 현재의 자신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내일을 준비한다는 순례길만의 의미는 한 사람의 인생과도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어 많은 이들이 지금도 자신을 발견하는 수행을 위해 그 길에서 순례를 하고 있다.

법장 스님
2006년 일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2011년 비구계를 받았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수학 후, 일본 하나조노대 대학원에서 계율학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감, 동국대 경주캠퍼스 겸임교수, 조계종 교육아사리, 일본 국제선문화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 『인터넷 카르마』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