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 성지순례길
권중서
정견불교미술연구소장
순례자와 부처님이 만나는 길
성지순례길은 순례자가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이며 부처님께서 순례자를 기다리시는 길이다. 한국에 수많은 성지순례길이 있지만, 대표적인 순례길 중에 삼보사찰과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서려 있는 관음성지, 걷는 걸음마다 불국토를 느끼게 하는 경주 남산으로 순례를 떠나보자.
통도사 금강계단 세존사리탑 |
◦ 삼보사찰 순례
- 불보종찰 통도사, 법보종찰 해인사, 승보종찰 송광사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삼보사찰이 있어 더욱 순례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삼보는 부처님(佛)·부처님의 말씀(法)·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승가(僧)로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 있어 가장 중요하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영골 사리와 비라금점가사(毗羅金點袈裟)를 금강계단에 봉안하게 되면서부터 불보종찰이 되었다.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께서 항상 중생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 금강계단은 계를 받는 곳으로 한번 계를 받아들이면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 금강석처럼 깨뜨릴 수 없기에 금강에 비유했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세존사리탑은 우러러 바라볼수록 가슴 벅찬 감동 그 자체로 2,600년 전 부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순례길이다. 합천 해인사는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 재조장경판 8만 1,258장을 봉안하며 8만 4,000가지 깨달음의 말씀을 전해줌으로써 법보종찰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기신론』에서 “삼라만상이 한 법(法)으로 새겨진 것이 해인”이라 했다. 쉬운 말로 한지에 대장경판을 꽝! 찍듯 변화무쌍한 중생의 마음(海)에 부처님 말씀을 새겨주는(印) 곳이 해인사이다. 대장경판을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모셔서 법보의 소중함을 전해준다. 법보 순례길은 『화엄경』에 “모든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 된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순례이다. 순천 송광사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 등 열다섯의 국사와 조선의 고봉법장 선사를 추념하면서 열여섯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종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송광사는 단계적인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 공간으로 보조국사는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는 생각에 집착해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라고 했다. 우리 자신의 본래 성품이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순례길이다.
남해 보리암 |
◦ 33 관음성지 순례길
- 고통 소멸케 하고 안락과 이익 주는 관세음보살의 중생구제 서원
한국인이 좋아하는 33 관음성지 순례길은 모든 고통을 소멸케 하고 안락과 이익을 주는 관세음보살의 중생구제 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관세음보살은 한량없는 백 천만 억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곧 그 음성을 관찰하고 듣고 모두 해탈케 한다”고 했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관세음보살의 서원은 경주 분황사에는 희명이라는 눈먼 아이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셨으니 눈이 없는 저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세요. 아아! 저에게 주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크실까!” 아이의 간절함과 순수함으로 바로 눈을 뜬 영험이 전한다. 관세음보살은 바닷가 깎아지른 절벽에 머무르신다고 해 바닷가에 있는 남해 보리암, 서해 보문사, 동해 낙산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유명하다. 특히 낙산사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현신인 파랑새를 보았다는 관음굴 위에 지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또 낙산사 보타전에는 모든 마구니를 물리치고 자비의 방편으로 분노상을 나타낸 분노관음의 머리 위에 중생의 무명(풀)을 거침없이 먹어치운다는 마두관음이 있어 퍽 인상적이다. 법주사 원통전의 관세음보살은 불퇴전의 중생구제의 서원을 팔과 종아리에 갑대(甲帶)로 표현했고 청룡을 탄 해상용왕은 바닷속 『화엄경』을 바치고, 연꽃 위에 꿇어앉은 남순동자의 모습은 “믿음이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또 보성 대원사 극락전의 수월관세음보살은 대나무 우거진 보타락가산 바닷가에 편안히 앉아서 법을 설하시는 모습이다. 옆에 둔 검은 정병엔 버들가지가 푸르러 관세음보살이 사바세계에 상주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선재동자는 파랑새를 안고 법을 듣고 있다. 예산 수덕사 관세음보살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들어가 그 바위에서 버선처럼 생긴 노란 꽃송이가 피어났는데 “관세음의 버선 꽃”이라 전해지고 있다. 서울 흥천사의 42수(手) 관세음보살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관세음보살로 손에는 여의주, 보검, 보탑 등 중생구제에 필요한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어 신이함을 더해주고 있다. 또 김천 직지사 대웅전 내부 서쪽 벽에는 청룡을 탄 백의관음보살이 용의 머리 위에 서서 파도를 헤치며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내가 남을 도와주면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고 남의 도움을 받았을 때는 그 사람이 곧 관세음보살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대자대비의 가피를 입게 된다.
◦ 경주 남산 순례길
- 불국토를 걷는 순례길의 백미
들쑥날쑥 불국을 걷는 순례길은 경주 남산만 한 곳이 없다. 동남산 미륵골 보리사의 석가모니불은 그야말로 몸짱 얼짱이다. 잘생긴 얼굴에 온화한 미소와 화려한 광배, 안정감 있는 연꽃대좌는 부처님께서 인도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좁은 산길을 따라 가면 작은 바위에 선정인을 한 부처님이 공중에 떠 있는 듯 경주 남산을 내려다보신다. 옥룡암을 바로 지나면 일명 부처바위라는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에 새겨진 불보살과 불탑의 아름다움에 입이 쩍 벌어진다. 당시 신라인은 신령스러운 바위에 변치 않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영원히 함께하고자 했다. 커다란 바위 사면에 사방불, 불탑, 여래, 보살, 비천, 나한, 사자, 보리수 등을 새겨 『법화경』을 표현했다. 북면은 『법화경』의 「견보탑품」 내용을 두 탑에 화려하게 나타냈다. 동면에는 선정인을 한 해맑은 얼굴의 아촉불과 부처님 쪽으로 몸을 틀어 생동감을 주는 보살, 천의를 휘날리며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는 천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남면은 마멸이 심하나 선정인을 한 단정한 모습의 허공주 삼존불이 얕게 파인 감실 안에 모셔져 있고, 앞 낮은 바위에는 잘생긴 원효 스님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서면에는 나무 아래 선정인을 한 아미타불이 약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위로는 비천 둘이 조각되어 있다. 탑곡에서 서북쪽으로 대숲 길을 따라 걸어가면 불곡에 울퉁불퉁한 바위 계곡이 낮게 깔려 있는데 유일하게 솟아오른 바위 속을 파 석굴을 만들고 내부에 고요히 선정에 드신 부처님을 조성했다. 당시 신라인들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얼마나 온화한 표정이면 경주 사람들은 ‘할매 부처님’이라 부를까? 용장리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힘들게 오르면 산 중턱 소나무 숲속 용장사 터 자연석 바위에 세 개의 둥근 대좌를 올리고 연화좌 위에 얼굴 없는 미륵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특이한 형태의 삼륜대좌가 있다. 태현 스님이 미륵부처님 주위를 돌며 예경하면 부처님도 태현 스님을 따라서 돌았다는 재미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륜대좌 부처님 옆 바위에는 부드러운 마애석가모니불이 순례하는 길손을 맞이해준다. 좁은 바윗길을 10m 정도 오르면 용장골 정상에 남산의 바위를 기단으로 한 3층 불탑이 당당하게 천년의 세월을 이야기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이곳 용장사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등불 돋운 긴 밤에 향 사르고 바로 앉아서 바람이 전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낱낱이 찾아 인간이 보지 못한 글을 지었다”고 회고했다.
경주 남산길을 순례하면 “부처님은 시공을 초월해 상주 불멸한 존재”임이 절실히 느껴진다.
권중서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불교미술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부터 ‘문화사랑 걸망 메고’를 운영하며 우리 문화 알리기에 주력하는 한편, 현재 조계종 전문 포교사로서 법무부 교정위원, (사)한국국가상징디자인연구협회 이사, 경기불교문화원 이사, 경기문화연대 운영위원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정견불교미술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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